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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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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손을 보니 이상한 게 보였다. 얼룩인가. 손가락으로 문질렀는데 안 지워졌다. 밝은 곳으로 가서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갈색 점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검…검…버섯. 아니라고 말해줘. 눈물 닦는다. 어쩔 수 없지. 자연스러운 현상인 거니까.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는 거겠지. 손등을 보다가 나이 먹음을 실감했다. 다른 시간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자기 연민에 빠지기에는 이런저런 복잡한 일에 마음을 더 빼앗기고 있으니까.
여섯 명의 소설가들이 모여 할머니를 주제로 쓴 테마 소설집 『나의 할머니에게』는 미래의 나를 상상하게 만든다. 첫 단편인 윤성희의 「어제 꾼 꿈」을 시작으로 백수린, 강화길, 손보미, 최은미, 손원평의 소설이 펼쳐진다. 나이 들어 버린 오늘에 회상하는 젊은 과거의 나. 가장 가까운 이들이 죽음으로 가출로 떠나고 홀로 남아 있는 공간에서 시간은 정지한다.
할머니로 불리는 것이 꿈인 할머니. 부모가 부재하는 자리에서 유년을 돌보아준 할머니. 치매로 기억을 잃어버리고 식탐이 늘어난 할머니. 가진 것이 많아 죽음 뒤에 이상한 유산을 남겨 놓고 간 할머니. 딸과 엄마를 거쳐 할머니까지 된 할머니. 미래에 홀로 남겨진 할머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할머니라고 불리고 할머니가 되어 미래의 어느 시점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전에 지구에서 사라질지도 모를 텐데. 가능하면 할머니라고 불리면서 살아가고 싶지만 장담할 수 없다. 윤성희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손주가 생겨 할머니라고 불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동생의 손녀가 만드는 마녀 수프를 끓이며 그런 소원을 빌었다.
백수린의 「흑설탕 캔디」는 죽은 할머니가 꿈에 찾아온다. 그녀에게서 달콤한 냄새가 나자 손녀는 말한다. "할머니, 손을 펴봐." 할머니는 주먹을 꼭 쥔 채 "이건 내 것이란다." 말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아낌없이 받았으면서도 더 무엇을 바란 걸까. 「선베드」는 강화길 특유의 비틀린 시선이 소설의 분위기를 차지한다. 착하게 구는 것과 착한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착하게 구는 게 더 힘이 든 세상인데.
할머니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할머니라고 불리며 좋아하는 텔레비전을 보며 저녁을 먹고 시장에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할머니가 되지 못한 여자. 할머니가 되기를 포기한 여자. 저출산의 미래를 암울하게 그려낸 손원평의 「아리아드네 정원」의 결말은 모두에게 찾아올 어느 날인 것 같다.
소설의 중간에 끼어 있는 그림을 펼쳐보며 과거를 떠올려 보기. 소설을 읽으며 미래를 상상해 보기.
나의 할머니는 없지만 너의 할머니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