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과 수납 - 공간과 물욕 사이에서
무레 요코 지음, 박정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소 슬리퍼 하나만 사 오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색연필과 귀여운 그림이 있는 인덱스도 집어 들고 말았다. 집에 와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색연필은 색깔별로 있고 인덱스도 여러 개 있다. 나 이거 알고 있었는데도 순간의 기분에 못 이겨 사고 만 것이다. 반성과 후회, 자책을 한다. 이천 원 더 쓴 거 가지고 대역 죄인이라도 된 것 마냥 굴 필요가 있겠냐고 하겠지만. 나란 인간에 대해 더 알게 되면 그런 말 못 하지.


정리뽕 받으려고 책을 읽었다. 무레 요코의 『나이듦과 수납』. 우리나라에는 『카모메 식당』으로 알려진 작가다. 목차만 봐도 당장 정리하고 싶어지지 않는가. 「드디어 버렸다」, 「이런 모습으로 살고 싶다」, 「의류」, 「속옷」, 「구두와 가방」……. 어떻게 정리하라는 지침 따위는 없다. 자신의 정리 체험기가 담겨 있다. 베란다 공사를 기점으로 무레 요코는 정리에 들어간다. 정리의 시작은 비우기부터. 그녀는 옆집에 사는 친구와 함께 비우기에 들어간다.


베란다에는 그야말로 쓰지 않는 물건의 무덤이었다. 전자제품이 많아 쓰레기봉투에 넣는 걸 포기했다. 현관으로 일단 옮겨 두고 매일 조금씩 베란다에 있는 물건을 정리했다. 의자와 전기난로, 반려동물 이동장, 공기 청정기, 자투리 천, 가습기 등을 비워 나갔다. 폐기물 업체를 불러 처리했고 다행히 업체 아저씨의 센스 덕으로 물건을 비웠다. 많이 비웠다고 했지만 드라마틱 한 변화는 없었다.


물건의 70퍼센트 정도를 버리지 않는 이상 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 후로 무레 요코는 천천히 자신만의 속도로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책의 제목이 『나이듦과 수납』이라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수납하는 노하우가 담겨 있을 거라 생각하면 실망. 쓰지 않는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과감함이 필요하다는 것. 단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비우기를 해야 한다는 것.


그녀는 패션 업계에 종사하는 친구의 조언을 따라 체형과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을 새로 구비한다. 무겁거나 해진 옷을 정리하고서. 속옷 챕터를 읽다가 책 읽기를 중단했다. 정리뽕이 온몸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책을 읽으며 실천한다, 나란 사람. 물건 욕심은 많지만, 책을 읽으며 정리한다, 나 이런 사람. 먼저 누렇게 바랜 런닝을 비웠다. 아랫단에 달린 레이스가 예뻐서 가지고 있었는데 보풀이 많이 일어나 있었다.


양말도 정리.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양말이 있었는데 역시나 보풀이 일어난 양말만 신고 다녔다. 과감하게 포장을 뜯고 새 양말로 서랍을 채웠다. 신지 않는 신발도 정리. 뒤축이 심하게 닳아 있었는데 고이 모셔 놓고 있었다. 정리를 하면서 쾌감을 느낀 뒤 다시 책을 읽어 나간다. 『나이듦과 수납』은 얇은 책이라 금방 읽는다. 차분하게 물건을 정리하는 무레 요코의 모습을 통해 나의 일상을 돌아 볼 수 있다.


나이가 들면 현명해진다고 했던가. 욕심이 늘어나는 건 아니고? 내 목표는 이십 년 넘게 가지고 있는 서랍장을 없애는 것이다. 칙칙한 갈색. 뭐가 잘못됐는지 위 칸을 열면 아래 칸도 열리는 서랍장. 나 할 수 있겠지? 오늘도 물건에 치여 하루를 우울하게 보내는 이들이여. 킬러 같은 냉혹함으로 물건을 처분하는 무레 요코의 정리기를 통해 인생이 홀가분해지는 기운을 받으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