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의 결심 - 2018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은모든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녁에 달이 뜨는 걸 보고 들어가서 아침에 해가 뜨는 걸 보고 나왔다. 구린 음질의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고 배가 부를까 봐 안주는 사절. 무슨 이야기를 심각하게 하긴 했는데 기억은 나질 않았다. 그러고도 오전 수업을 들으러 갔다. 난 정말 술꾼 체질인가 봐. 자부하면서. 학과 특성상 술모임은 잦았다. 기분이 좋아도 나빠도 칭찬을 들어도 비판을 들어도 결말은 술.


그렇게 허랑 방탕하게 대학교 1학년을 보내고 겨울방학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시간만 보냈다는 자괴감에 빠져 지냈다. 숙취가 싫어졌고 술자리 끝에는 시비와 힐난과 무시가 있었다. 그 꼴이 싫어 술도 안 마시고 불러도 안 나갔다. 뭐. 불러주는 데는 많지 않았다. 비인기인이었다. 나는 내가 술을 잘 마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마시는 걸 좋아하는 거였다. 물, 음료수, 커피 등등. 액체는 무조건 좋아하는 거였다.


지금은 일절 안 마신다. 술. 마시고 누우면 천장이 빙글빙글 나도 빙글빙글 지구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 느낌이 싫고. 술 마시고 우는 진상을 몇 번 겪은 끝에 어쩌면 나도 그 꼴을 보일까 봐 멀리멀리 하고 있다. 은모든의 장편소설 『애주가의 결심』은 재미있는 소설이다. 2018년에 출간된 소설인데 나 왜 이제야 읽은 걸까. 사 놓은지 한참 된 책인데. 술주희라 불리는 주인공. 볼 때마다 사람들은 감탄한다. 어쩌면 그렇게 술을 맛있게 마시냐고.


서른. 아니 만으로는 스물아홉. 푸드 트럭 하다가 망해 먹고 지금은 백수 상태. 술주희가 쌍둥이를 낳은 선배 집에 가서 술을 마시는 장면으로 『애주가의 결심』은 시작한다. 안주는 집주인이 내오고 손님들이 술을 사 오는 방식으로 모임이 열렸다. 그중에 술주희가 제일 싼 술을 사 왔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사업이 망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술주희는 신나게 술을 마신다.


어쩌면 썸을 탈 수 있는 남자를 앞에 두고서도 잘도 마신다. 평생 처음으로 필름이 끊긴다. 다음날 일어났을 때는 사건이 종료되었다. 만취 상태에서 트위터에 글을 올리고 사촌 언니와 카톡을 하고. 누군지도 모르는 이에게 '그렇게 가신 거예요? 저한테도 해명할 기회는 주셔야죠!'라는 대략 난감한 문자가 와 있다. 이 일을 어쩌냐. 라고 썼지만 『애주가의 결심』은 심각하지 않다.


오히려 즐겁고 유쾌하고 신나기까지 하다. 도저히 신나고 하하 호호 웃을 일이란 술주희 한테 없는데도 말이다. 사촌 언니 집에서 함께 살면서 방세를 아끼기로 한다. 언니 우경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유는 알려줄 수 없단다. 백수에 애인은 없고 집도 절도 없는 술주희. 끝까지 좌절하거나 힘들다고 징징대지 않는다. 특기인 요리 실력을 살려 안주를 만들고 망원동을 중심으로 술집과 맛집을 찾아다닌다.


『애주가의 결심』은 우울한 청춘의 자화상, 고민하는 밀레니얼의 세태, 미래를 위한 파격적인 제시 같은 모호하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씩씩하고 소화 기관에 문제없고 잠 잘 자는 술주희의 오늘을 보여준다. 불행과 슬픔, 고통을 욱여넣은 이야기가 최고라고 여겼는데 『애주가의 결심』은 그런 진부한 설정을 단번에 깨트린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 물건부터 사는 사촌 언니 우경. 번역과 과외를 하면서도 지치지 않는 배짱.


그리고 우리의 술주희. 술의 세계는 1도 모르지만 발랄하고 건강한 그녀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애주가의 결심』을 읽는 내내 행복한 기분이 떠나지 않았다. 애주가의 결심이란 대단한 게 아니고 이제 막 시작되는 우정일까 사랑일까의 기류에서 기분 좋음을 있는 그대로 느껴 보는 것이다. 무턱대고 과장하거나 희화화하지 않고도 인물을 그려내는 솜씨가 훌륭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