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땅
김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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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체르노빌》에서 군인은 소젖을 짜는 여자에게 지금 당장 떠날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 여자는 자신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그간에 전쟁도 겪었다고 떠나지 않겠노라고 고개를 젓는다. 원전이 폭파되고 방사능으로 피폭이 된 상태에서 마을 주민들은 소개령에 의해 살던 집에서 나와야 했다. 간단한 짐만을 꾸린 채였다. 다시 돌아올 줄 알았겠지. 체르노빌에서 내가 격하게 감정 이입을 했던 장면은 그런 것이었다.



힘들게 장만하고 정성껏 가꾼 집을 버려야 한다는 것. 애써 모은 살림을 그대로 두고 나와야 한다는 것.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전쟁이 일어나도 떠나지 않을 거야. 죽더라도 집에서 죽을 거야,라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했다. 그걸 그렇게 두고 떠나야 하는 심정. 김숨의 장편 소설 『떠도는 땅』은 우리 역사의 아픈 장면으로 데리고 간다. 가축을 실어 나르는 열차에 조선인들을 마구 집어넣었다. 러시아인들은 사흘 뒤 떠나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남편이 간도 지방으로 장사를 하러 나갔는데. 열흘 정도만 기다리면 남편이 돌아오는데. 살이 통통하게 찐 염소를 데리고 갈 수도 없단다. 집과 힘들게 개간한 땅도 그대로 두고 가야 한단다. 부랴부랴 식량을 꾸리고 열차에 올랐다. 그들은 남편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악취가 풍겨오고 마실 물도 없는 열차에 탄지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없다.



『떠도는 땅』은 1937년 소련에 의해 조선인 17만 명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한 역사를 그리고 있다. 정확히 어느 곳으로 가는지 얼마나 걸리는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열차에 태워졌다. 임산부, 부부, 노인, 아이, 남성.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이 들려주는 자신의 삶과 한의 이야기가 한바탕 펼쳐진다. 서사는 축약되고 대화로서 소설은 진행된다.



평생 자신의 땅을 가져보지 못한 이들이 살 길을 찾아 북으로 올라왔다. 혹독한 추위와 핍박을 이겨내고 땅을 일구어냈다.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들었다. 조선인 학교를 세우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러시아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가난과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껏 일을 했다. 소련 정부는 혁명을 완수했고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외모가 흡사해 일본 첩자를 가려내기 힘들다는 이유와 당시 불어나는 조선인들이 자치구를 형성할지 모른다는 염려가 강제 이주의 원인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인구가 급감하게 되면서 인위적인 인구 유입 정책이 필요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떠도는 땅』은 좁은 화물 열차 칸이라는 배경의 협소함을 인물의 발화로 극복한다. 조선인이라는 공통점으로 그들은 가혹한 시간을 버텨낸다.



누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누구의 이야기인지 모른다. 그러나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추위와 허기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황량한 땅을 건너가고 있다. 땅을 찾아왔지만 땅을 빼앗기고 떠도는 삶에 대해 말할 뿐이다. 김숨의 소설은 이제 노래가 되었다. 자신의 어두움. 자신의 힘듦. 자신의 고통. 자신의 슬픔을 이고 살아가야 할 때 나는 어떻게 미치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는가.



김숨은 끊임없이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답한다. 누가 듣고 있지 않아도 된다. 『떠도는 땅』에서 열차에 갇힌 그들은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의 끝에는 믿기지 않겠지만 삶이 있었다. 그 땅에서 다시 살아야 한다는 희망이 있었다. 모르고 지나갈 뻔한 아픈 역사를 알았다. 역사를 소설로 배웠어요, 내 경우가 그렇다. 소설이 계속 쓰여야 할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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