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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음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일어날 일은 어찌 됐든 일어난다. 왜 그랬어?라는 말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배운다. 사고를 막아보려 했지만 벌어졌고 낙담한 채 살아간다. 후회를 하는 일로 남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니까 후회는 상처를 봉합하는 데 약간의 도움은 준다. 어떻게? 물어보았자 명쾌한 답을 줄 수 없다. 그건 겪어본 사람만이 알고 느끼는 감정이니까. 깊은 후회와 빡침으로 자신의 과거를 안고 가는 이들은 또한 안다. 삶은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을.
폴 오스터의 초기 소설 『우연의 음악』은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책임을 다하는 자의 이상한 성실함을 보여준다. 다소 기괴하고 낯선 일이 우연의 연속으로 일어난다. 소방관으로 근무하는 짐 나쉬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현실의 상처를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얻어본다. 예전에 어두운 방에서 읽었던 폴 오스터. 출판사 열린책들 특유의 무거운 판형으로 읽었다. 손목이 부서질 것 같았는데(이건 좀 오반가? 손목이 아릴 정도로 무거웠던 책의 기억이다) 이야기 속으로 쉽게 빨려들 정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전자책으로 다시 읽는 폴 오스터. 아내는 집을 떠나고 두 살 남짓한 딸을 혼자 키울 수 없어 나쉬는 누나 집에 맡긴다.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비를 갚는 동안 그의 가정은 파탄이 났다.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가 등장한 건 나쉬의 인생이 벼랑 끝으로 몰려 있을 때였다. 아, 6개월 전에만 나타나주지. 삶은 얄밉게도 고통스러운 타이밍에 행운의 한 쪽 순간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산을 남겼다는 변호사의 연락을 받는다. 누나와 반을 나누고 빚을 갚고 새 차를 구입한다. 그때부터 나쉬의 인생은 이상하게 흘러간다. 차에 올라타는 순간 그는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음을 느낀다. 그전까지의 인생이란 주도권 없이 흘러갔다면 뜻하지 않은 행운이 굴러들어오면서 인생의 방향 정도는 내가 지시할 수 있구나를 실감한다. 나쉬는 일을 그만두고 집을 정리하고 딸을 위한 신탁 예금을 넣어두고 남은 돈으로 방랑을 시작한다.
그 길 위에서 잭 포지를 만난다. 자칭 운이 좋은 도박사라고 하는 그 젊은이를 차에 태우는 순간 다시 한번 나쉬의 삶은 뒤바뀐다. 한몫 크게 잡을 수 있다는 다소 허풍이 담긴 포지의 말을 믿기로 한다. 그는 남은 돈을 포지에게 올인한다. 포지가 포커 게임을 할 수 있도록 돈을 대는 것이다. 『우연의 음악』에서 사건은 그냥 일어난다. 우연히 아버지의 유산을 받고 마음 끌리는 대로 자동차 여행을 다니고 어느 날 흠씬 두들겨 맞은 젊은이 잭 포지를 만난다.
폴 오스터가 그려내는 사건이란 될 대로 되라는 식이다. 1과 1을 더하면 2가 되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수학이 인생에는 통하지 않는다. 어쩌다 1이 1을 만나도 3이 되고 4가 되는 식이다. 당장 오늘도 버텨낼 수 없는 순간에 처한 인물이 행운을 만난다. 노력과 성취, 인내 따위는 던져 버려라. 성공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연의 음악』에서 나쉬와 포지가 만나는 백만장자 두 사람은 평범하게 자기 인생을 살아간 이들이었다. 굉장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만 이렇게 힘든 건가. 내 인생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자괴에 빠지는 시간이 있다면 폴 오스터의 세계와 조우할 수 있기를. 되는 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다만 책임질 일에는 책임을 지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우연의 음악』은 이야기한다. 고통스러운 상황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참담해하거나 스스로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부단한 노력보다는 책임이 우리를 내일로 나아가게 한다.
돈의 진정한 이점은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폴 오스터, 『우연의 음악』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