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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평론가 백지은도 그렇지만 나 역시 권여선의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에서 「손톱」이 제일 기억에 남았고 사무쳤다. 좋았고 슬펐고 암담했다. 여덟 편의 소설 중에서 네 편을 미리 읽었다. 「모르는 영역」과 「손톱」, 「희박한 마음」, 「전갱이의 맛」. 「손톱」을 다시 읽었을 때 처음 읽으며 느꼈던 마음이 다시 떠올랐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어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소희의 불투명한 내일에 대한 소설 바깥의 나의 마음. 소희는 분명 소설 안의 사람인데 왜 이렇게 감정 이입이 쉽게 될까.
그 아이, 소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손톱」에서 소희가 받는 월급 170만 원. 언니가 훔쳐 달아난 소희의 저금과 대출금. 매운 짬뽕을 포기하고 걸어가며 생각하는 돈의 무게. 권여선은 묘한 아픔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옛다 아픔을 선물하는 것이다. 촬영 나온 딸과 만나 하룻밤을 동행하는 아버지. 여자 혼자 살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지켜가는 사람. 초단기 계약을 하며 누구 눈치를 볼 것도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기간제 선생님.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하는 짓은 양아치, 그걸 부인하는 모자. 살아 있는 어머니의 죽음을 미리 걱정하는 남매. 쓸쓸한 노후를 예감하는 중년. 말을 잃어버린 뒤에야 자신의 언어를 찾고 싶었던 남자. 『아직 멀었다는 말』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 아니 사람의 모습에서 나는 힘을 얻는다. 그들이 겪는 일상의 시련과 고난 때문에 힘이 빠져야 하는데도 말이다.
권여선은 소설의 세계로 완벽하게 안착했다.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허황되고 과장된 이야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현실성을 확보한다.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고가의 다이어트 약을 먹어야 하는 세계. 두 달 계약인데 계약 연장을 암시함으로써 불안한 희망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세계. 권여선은 소설에 일상의 슬픔을 은근히 깔아 놓고 시작한다.
권여선의 은근한 슬픔은 거대한 슬픔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소설 바깥의 나는 지치고 불안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무엇과 어떤 것으로 힘을 내야 하나. 이런 생각으로 골몰한 채 살아가고 있을 때 『아직 멀었다는 말』이 다가온다. 여덟 편의 슬픔. 여덟 편의 고독. 이런 이기적인 마음이 있다. 누군가의 힘듦을 보고 힘을 얻는 역설. 치사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은 소설이다.
권여선은 세밀하고 꼼꼼한 소설적 눈으로 인간상을 그린다.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보며 아직 여기의 나는 괜찮다, 같잖은 희망을 얻어낸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이거면 된 거 아닐까. 여기가 바닥이 아니다, 나는 깊은 터널을 걸어가는 것일 뿐이다. 빠져나갈 수 있다는 위로를 스스로 얻어내는 것. 걱정이 많은 게 걱정인 요즘의 당신에게.
『아직 멀었다는 말』은 슬픔의 힘으로 걸어가라고 말한다. 그건 권여선의 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