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슬아 지음 / 헤엄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 원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일주일에 만 원을 주고 행복을 느껴보라는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출연자들은 만 원을 알뜰살뜰하게 썼다. 도시락을 싸서 다니고 물은 정수기 물로 마시고. 지인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얼마간의 돈을 받았다. 지금은 그런 예능이 힘들겠지. 겨우 국밥 한 그릇 먹고 편의점 가서 커피 우유를 사 마시는 정도. 시집 한 권을 사면 시집 한 권만 손에 남는 정도.

내 지갑 속 만 원이 누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렸을 때 읽은 책에서 보았던 구절. 현자가 문제를 낸다. 이 방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물건을 사가지고 오너라. 천 원도 안 되는 돈을 주고서. 뭐야, 치사하게. 천 원이 다 뭐냐. 십만 원은 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해라. 나는 현자의 질문을 비웃으며 답을 알고 싶어 서둘러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초를 사 오면 된단다. 초에 불을 붙이면 그 불빛으로 방을 밝히고도 창문 너머까지 밝게 할 수 있단다.

지금은? 내가 했던 사치 중에 하나는 양키 캔들을 산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얼마 안 썼다. 기분 탓인지 그걸 쓰고 나서는 전기세가 많이 나오는 것 같았다. 좋은 냄새가 나긴 나는데 하루 종일 지속되지는 않고 초는 금방금방 닳아 버리고. 무언갈 태우는데 돈을 쓴다는 게 합리적이지 않아 보였다. 소심한 꼼쟁이에게 양키 캔들은 쓰임이 없었다. 자꾸 돈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없다. 아니 구체적이고 신파적인 이유가 있는데 솔직하지 못한 나는 그걸 글로 쓸 자신이 없다. 아마 이슬아라면 썼겠지.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뒤늦게 읽었다.

에스엔에스를 안 하는 나로서는 이슬아가 직접 독자를 구하고 자신의 글을 메일로 쏴주는 그런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 공짜는 아니고 만 원을 받는단다. 그래서 글 앞에 만 원에 대해 구질구질하게 쓴 것이다. 나에게 만 원이란.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돈은 아니고 좋아하는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을 푸짐하게는 아니고 고르고 골라서 사는 정도의 돈. 관리비, 인터넷비, 휴대전화비, 각종 보험료를 내는데 보태는 돈. 만 원의 가치는 지금에서야 아주 미약해서 그걸로는 무얼 다 낼 수는 없고 그저 보태는 정도.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읽으면서 느낀 건 이 사람은 부지런하고 생각이 많고 사랑을 숨기지 못하는구나였다. 2018년 3월부터 6개월 동안 매일 한 편의 글을 써서 만 원을 입금한 이에게 보냈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때론 힘에 부쳐서 제시간에 보내지 못한 날도 있었지만 그는 빠짐없이 글을 써서 보냈다. 아마 그 원동력이란 만 원의 힘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글을 쓸 수 있게 만든 힘은 돈이었을 거라도. 돈은 그런 힘이 있다. 나를 주눅 들게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다그친다. 내일 내야 할 돈을 생각하면 오늘의 나는 글이란 걸 쓸 수밖에 없거나 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양이를 기르고 화분 열 개를 책임지는 사람. 엄마, 아빠, 동생을 사랑하는 사람. 자기가 벌어서 교정도 하고 그게 좋음을 알고 동생도 시켜주는 사람. 유럽 여행에 가서 외국인들에게 당했던 추행과 기행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사람. 여행의 낭만을 포장하기 보다 자신이 겪은 그 일이 두려움으로 남았더라도 글로 써서 누군가에 들려주는 사람. 자기보다 잘 쓰는 친구의 글을 혼자만 보기가 아까워서 돈을 주고 사서 독자에게 보내는 사람. 그 돈이 친구에게 어떻게 쓰이는지 알아서 행복한 사람.

나는 왜 이슬아가 돈에 대해 쓴 부분이 유독 좋을까. 『일간 이슬아 수필집』에는 그가 돈 때문에 겪은 일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돈이 너무 좋다고도 쓴다. 돈에 대해 말할 줄 아는 사람. 올 한해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숨기거나 포장하지 않는 쪽으로. 담백하게 말하고 싶다. 사실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하루 만에도 다 읽을 수 있었다. 내게는 그럴 시간이 요즘에는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내내 균형이 맞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시간이 없거나. 시간이 많거나. 돈이 없거나. 돈이 있거나, 이건 아니네. 늘 돈은 부족한 쪽으로만 있었네.

적당하게 재화와 서비스가 내 삶에는 분포되어 있지 않다. 이슬아 역시 그런 것 같은데 그런데도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친구를 사귄다. 그와 나를 비교하는 게 아니다. 이런 일들은 무엇이 많다고 해서 알맞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기에 대단하다고 추켜 세울 수밖에. 그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꿈을 꾸고 꿈을 팔면서도 서로가 가진 생활의 안녕을 기원한다. 무언갈 쓸 수 있어서 좋다고. 친구와 자신은 쓸 줄 아는 사람이기에 살아갈 수 있다고. 『일간 이슬아 수필집』은 두껍다. 6개월치의 글이 묶여 있어서. 나는 책을 캐릭터 인형 위에 올려놓고 누워서 읽었다.

어떤 책을 읽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의 시력이 0.1111…이 좋아지곤 한다. 세상을 보는 나의 관점은 비비 꼬여 있고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기까지 하는데 그걸 눌러주는 게 책이다. 책을 읽으면 나보다 잘났는데 꼬여 있지도 않고 자신만의 색다른 관점을 가진 타인들이 세계를 정의하고 논리적인 언어로 현상을 이야기해 준다. 난 그걸 읽으며 착하게 살고 돈에 대해서는 관대해지자면서 약간의 소비를 즐긴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읽으며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는 방식을 보며 쾌감을 느낀다. 나 대신 솔직해줘서 고맙기까지 한다.

내 지갑 속 만 원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 돈으로 누군가가 아닌 이슬아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괴한 확신이 들었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통해서. 한 달에 만 원을 내면 내 메일함으로 정성스럽고 꼼꼼하게 직조한 이슬아의 일상이 꽂히는 것이다. 그걸 보고 힘을 내거나 힘을 잃거나 하면서 하루를 살 수 있다. 되도록이면 힘을 낼 수 있는 쪽으로 버텨보는 것은 수신인인 나의 몫이겠지만. 초를 사서 방안을 밝히는 대신 글을 사서 마음과 오늘을 밝히며 내일을 기대해보는 21세기적 고통 치유제로서 『일간 이슬아 수필집』이 존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