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드릴게요 - 정세랑 소설집
정세랑 지음 / 아작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아, 재미있다. 재미있으니까 자꾸 읽고 싶다. 읽다 보니 책이 끝났네. 정세랑의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정세랑이 쓴 SF 소설 여덟 편을 모은 이 책은 사랑스럽고 귀여운 인물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정세랑 월드의 사람들은 할 말 다하고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는 화끈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종종 이건 현실의 소설가가 대리 만족을 느끼기 위해 썼구나 라고 추측을 해본다.

아직도 읽지 않았다면 얼른 읽어보시길. 『목소리를 드릴게요』에서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시간 여행을 하고 모조 지구에서 탈출하는 다이내믹한 모험을 펼치는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사랑이다, 오직. 그와 그녀들이 시간을 뛰어넘고 죽어가는 연인을 위해 다니던 직장에 휴가를 내는 이유는. 지렁이가 지구를 정복하더라도 좀비떼가 창궐하더라도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을 잊지 않는다.

나만 아는 작가인 줄 알았는데, 정세랑은. 어느덧 유명해져서 너도 나도 정세랑을 읽고 있다. 괜찮아. 망해가는 지구에서 부자가 되어 소설을 쓸 수만 있다면. 안전 가옥을 구매할 재력을 가지고서 통신사 하나쯤을 사들여 정세랑이 쏘는 와이파이존에서 배달되는 전자책을 읽을 수 있다면.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모든 소설이 흥미진진하고 가독성이 높다.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인 나는 막연하고 우주적인 상상력이 없어 SF 소설로 쉽게 빠지지 못하는데.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그렇지 않다. 지구적이고 우주적이면서도 생활밀착 SF 소설이다. 한 발은 지구에 두고 한 발은 우주에 두면서 읽을 수 있다. 「11분의 1」에서 우리의 다혈질 주인공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하는 이를 사랑해서 우주 밖으로 떠난다.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아, 사랑이여.) 세 시간 동안 기억력을 증폭 시켜주는 알약이 개발되고 원래 일이라는 게 전부 계획대로 되지 않지 않아 알약이 이상한 곳에 쓰이는 역사를 다룬 「리틀 베이비블루 필」은 그런 약이 있다면 나는 먹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표제작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목소리만으로도 살인 충돌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갇힌 학교 선생 여상균씨의 모험을 날렵하게 그린다. 여상균 씨 또한 마지막에는 인어공주의 길을 따른다. 사랑 없이 살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다. 파괴와 혐오, 무질서로 인한 혼돈으로 지구가 망해가도 사랑은 있다고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이야기한다. 짧았던 데이트의 추억을 가지고 좀비로 변해버린 애인의 방문을 받는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의 나. 애인을 깔끔하게 보내주기 위해 한 발의 화살을 남겨 두는 사랑을 가진 나.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하는 일이 지구에서 해야 할 마지막 임무라면 기꺼이 사랑을 하겠다. 정세랑은 소설을 통해 그렇게 말한다. 부디 사랑을 최고의 가치라 여기는 인물의 삶에 행복이라는 희귀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기기를 바라며 정세랑 월드의 문을 닫고 나온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소설의 결말은 그러한 희망의 불씨를 남겨 놓았다. 헬리콥터가 와서 참치캔만 주고 가더라도 그게 어딘가. 다양한 맛으로 부탁해요. 고추 참치 꼭 챙겨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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