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브리나
닉 드르나소 지음, 박산호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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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드르나소의 『사브리나』의 한국어판 책 뒤표지에는 박찬욱, 이동진의 추천평이 실려 있다. 박찬욱은 함부로 읽지 마시라 경고하고 이동진은 짧고 굵게 책의 주제를 압축한다. 이동진의 한줄평은 이렇다. '이것은 확신에 찬 허위가 당황하는 진실을 압도하는 서늘한 세계다.' 『사브리나』를 읽고 한참을 곱씹어 본 문장이다. 나보다 지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어 보고 싶어서.

『사브리나』의 진입은 쉬웠다. 컬러판 만화이고 동글동글한 그림체였다. 부모님의 고양이를 맡고 있는 사브리나는 동생 산드라의 방문을 받는다. 그들 자매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산드라가 예전에 여행하면서 겪었던 불편한 경험을 들려준다. 그러면서 괜찮다고 끔찍한 인간들은 호텔에 있으니 같이 여행에 가자고 한다. 사브리나는 가겠다고 한다. 동생이 떠나고 사브리나는 무언갈 쓰고 집을 나간다.

컷이 바뀌고 단발머리를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무기력해 보이는 듯하고. 지쳐 있는 듯하고. 친구가 마중을 나와 남자를 데리고 간다. 단발머리 남자의 이름은 테디. 그를 데리고 온 남자는 캘빈. 캘빈은 아내와 별거 중이다. 아이가 네 살이 되던 해 일에 집중만 하는 남편을 견딜 수 없었다. 캘빈과 테디는 기묘한 동거에 들어간다. 아이의 방을 테디에게 내주고 자신의 방만은 들어오지 말 것을 주문한다. 말이 없는 테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테디. 곧 그의 사연이 밝혀진다.

『사브리나』의 진입은 쉬웠지만 중간 과정이 힘들었다. 박찬욱의 표현대로 폭력적인 장면 하나 없이도 끔찍하고 우울했다. 이야기의 전부를 말할 순 없다. 스포가 될 테니까. 사브리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녀는 무슨 글을 쓴 걸까. 테디는 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까. 닉 드르나소는 인물들에게 표정을 부여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표정을 알고 싶어 작은 칸에 그려진 인물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내 깨달았다. 표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표정도 지을 수 없음을 표현한 것이라는걸.

종종 우울한가. 가끔 우울한가. 당신의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나고 불안한가. 『사브리나』는 인생의 역경을 어떻게 타파할 수 있을지 힌트를 보여준다. 타파하는 방법이 아니다. 『사브리나』속 인물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모습을 통해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날 수 있을지를 가늠할 뿐이다. 진실은 거짓이 거짓은 진실이 되기 쉬운 세상.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진실이 있을까. 확실에 찬 허위는 진실을 압도한다.

『사브리나』를 읽고 생각에 잠겼다. 진실이라고 포장된 사실에 대해서 곰곰이. 포장지를 벗기면 진실이 아닌 잘 만들어진 거짓에 대해서. 사브리나, 산드라, 테디, 캘빈의 내일에 대해서. 어둡고 우울하지만은 않다, 『사브리나』는. 테디는 캘빈의 아이가 남겨 놓고 간 책을 읽는다. 알록달록하고 어려운 질문과 생각이 없는 책을. 다른 그림을 찾고 알파벳을 들여다본다. 이토록 단순한 것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움직인다.

집에서 사라진 책을 고양이를 찾으러 나가고 할 수 있는 일에 지원을 하고 자전거를 탄다. 진실을 믿는 게 아니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나를 믿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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