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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이모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1
박민정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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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내 남자친구가 되었던 복학생 선배는 내게 겉멋이 든 것 같다고 했고, 수많은 학우들은 소설을 읽기도 전부터 '서독'이라는 표현 하나만 듣고 "간호사 고모와 광부 고모부야?"라고 물었다.
(박민정, 『서독 이모』中에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스물한 번째 소설 『서독 이모』의 제목을 들었을 때 나 역시 소설 속 사람들처럼 간호사와 광부의 이야기라고 짐작했다. 산업 역군이라는 말로 포장된 채 온갖 고생을 한 그들의 역경 서사라고 생각했다. 소설을 읽으며 나의 빈약한 상상력을 한탄했다. 소설은 1980년대 독일에서 공부하고 정착한 지식인의 비애를 그리고 있다. 『서독 이모』는 박민정이 소설가 박민정으로 가능할 수 있게 한 서사를 담고 있다.
1980년대에 서독으로 공부하러 간 이모는 자신을 늘 서독 이모라고 말했다. 동독과 흡수 통일을 한 독일이 되었을 때도 말이다. 소설 속 화자 정우정은 그런 이모의 서사를 듣고 자랐다. 독일 현대 희곡을 전공한 이모는 틈틈이 드라마를 쓰기도 했다. 통일이 되고 그곳에서 만난 한국계 독일인인 클라우스와 결혼한다. 독일과 한국에서 결혼식을 각각 치른다.
어린 정우정은 독일인 이모부의 모습을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이모부가 서독 이모와 결혼한 지 2년 만에 실종되었다. 자라면서 "경희 이모 남편은 찾았대?"라고 종종 물어본다. 엄마는 이모의 불행이 심심풀이 땅콩이냐면서 혼을 낸다. 정우정은 더 이상 클라우스의 행방을 묻지 않는다. 정우정은 소설을 쓴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줄도 쓰지 못하다가 도피처로 삼은 곳이 대학원이었다.
그곳은 지식인들이 서로를 헐뜯고 비아냥거리는 아비규환 자체였다. 소문은 추문이 되고 호의로 가장한 염려는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정우정은 경희 이모의 서사를 대입해서 자신만의 소설을 쓰려고 한다. 최 교수의 도움을 받아 독일어 원서를 읽고 논문을 완성한다. 창작하는 학생이라면 실기 논문을 쓸 것이지 하는 모욕을 받으며. 정우정은 아슬아슬하게 대학원을 졸업하고 계약직으로 취업한다.
일은 만족스럽지만 묘하게 삶의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을 받는다. 끝까지 자신을 서독 이모라고 부르는 경희 이모와 그의 남편 클라우스의 이야기를 쓰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서독 이모』는 통일이 되기 전 독일에서 독일 현대 희곡을 전공한 이모의 서사에서 분단된 한국에서 소설을 쓰려는 '나'의 서사가 겹치면서 쓰기란 무엇일까를 탐구한다. 경희 이모는 드라마를 쓰고 싶어 했다. '나'는 소설을 쓰려고 한다.
어떤 마음을 먹어야 소설 쓰기를 사명으로 삼은 채 살아갈 수 있을까. 소설을 쓰고 싶어 서독 이모에 대한 서사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나'는 무엇에 책임을 지며 살아야 할까. 온갖 의문을 품은 채 정우정은 소설을 쓰려고 한다. 때론 쓴다는 행위만으로 고통과 고독으로 점철된 삶을 통과할 수 있다. 박민정은 『서독 이모』를 쓰면서 쓴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간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쓴다. 쓰는 자는 그런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