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단경로 - 제25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강희영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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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과 이곳의 시차

버스는 삼십 분에 한 대씩 있다.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달린다. 멀어지는 버스의 뒷모습을 보는 일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꿈까지 꿀 정도이다. 달려갔지만 나만 두고 떠나는 꿈. 휴대전화에 깔아둔 시내버스 앱을 켜면 버스가 어디에 있는지 뜬다. 그걸 알기 때문에 더더욱 달린다. 매번 버스는 잠시 후에 도착할 예정이다. 버스를 타고 가지 않는 방법도 있다. 택시를 타거나 걷거나. 전자는 돈이 많이 들고 후자는 힘이 많이 든다. 매일 매 순간 일하러 가기까지의 최단 경로란 버스를 타는 방법 밖에는 없다.

딱 한 번 걸어가 본 적이 있다. 사십 분이 걸렸고 문을 열기도 전에 지쳐 버렸다. 힘이 나지 않으니 힘을 낼 수 없었다. 버스가 최선이다. 이 삶에서는. 강희영의 소설 『최단경로』의 주인공 애영은 다미안이 강의하는 첫 수업을 인상적으로 기억해낸다. 다미안은 점과 점을 찍으며 묻는다. '이 점에서 저 점까지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직선을 그으면 된다. 기계는 그렇게 말하고 실제 점과 점 사이에 직선을 긋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 말은 정답이 될 수 있을까. 『최단경로』는 점과 점 사이를 연결하는 직선을 그어가는 소설이다.

너에게로 가기 위한 최단 경로

혜서는 전임 피디 진혁의 노트북에 있는 업무 파일을 읽다가 이상한 느낌에 휩싸인다. 진혁은 메일 계정을 로그아웃하지 않은 상태로 노트북을 넘긴 것이다. 메일함을 열기 전 혜서는 그가 녹음한 방송 파일에서 특정 트랙을 발견했다. 우연히 드러난 소리였다. 몰래 숨겨두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그 소리를 듣게 되면서 혜서의 삶은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최단경로』는 혜서가 진혁이 남겨둔 미스터리한 소리와 맵에서 드러나는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이야기이다.

공부를 더 하겠다는 이유로 인기 방송 피디를 그만두고 떠난 진혁이었다. 후임 피디 혜서는 그의 방송을 그대로 이어서 하기만 하면 출세가 보장되었다. 그 소리를 듣기 전까지 말이다. 소설의 시간은 이어질 듯하면서 어긋나다가 마지막에는 하나의 시간으로 맞춰진다. 엇나간 시간을 맞추기 위한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불완전한 삶의 진실과 마주한다. 혜서는 진혁의 계정에서 검색되는 거리와 장소를 토대로 그를 만나러 떠난다. 호주로 가겠다는 그는 네덜란드에서 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도 부지런하게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최단경로』는 단순한 서사임에도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혜서는 아무런 감정적 교류도 나누지 않은 진혁을 만나러 네덜란드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다른 그녀와 만나 연대를 시작한다. 다른 그녀, 애영은 교통사고로 친엄마와 딸을 잃었다. 운전자는 맵에서 횡단보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 그대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오류였다. 횡단보도가 있음에도 기계는 지도에서 길을 길로써 인식하지 못했다. 오류는 나중에야 바로잡아졌지만 애영이 사랑한 사람들은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실제 없던 장소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지도에 들어가기도 한다. 정확한 좌표를 찍어서 가보면 없는데도 말이다. 있어야 할 장소가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일도 있다. 기계와 인간이 만들어내는 오류 때문에 마땅히 있어야 할 점이 없어서 경로를 이탈한 죽음이 밀어 닥친다. 애영은 딸과 엄마에게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프로그램 언어를 배운다. 건물, 강, 호수, 바다, 횡단보도를 끼고서도 가장 빨리 가기 위한 길을 찾는 공부를 한다. 매일 길을 떠나는 자들이 찾아야 할 최단 경로를 익힌다.

같은 기기에 동기화한 계정으로 혜서는 진혁이 아닌 애영과 만난다. 점이 표시해준 위치에 진혁이 아닌 애영이 있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과거의 시간을 접한 혜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경로를 이탈한 채 그대로 떠난다. 『최단경로』는 죽음 이후에 남겨진 자들이 취하는 애도의 태도를 그린다. 애영은 기계 언어를 공부하면서 안락사를 기다린다. 진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인 라디오 방송에 소리를 숨겨두고 사라진다.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소설은 죽음 이후의 삶은 삶이 되어야 하는가를 묻는다.

어디 가지 말아요라고 했지만 어디에도 없는 존재

가장 빠른 길을 찾아 돈을 벌러 가지만 그 길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혜서는 경쟁과 모욕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는 것으로 느껴진다. 맵이 보여주는 점의 행방을 찾고 숨겨진 소리의 사연을 알게 되면서 혜서는 깨닫는다.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라고 여겼지만 하나의 점에 불과한 채 떠돌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무언가로부터 얽매이지 않고 한낱 점으로 부유할 수 있음을 말이다. 우주에서 보면 얼마나 시답잖을까. 저 조그만 별에서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꼴이라니. 빠르게 움직이며 무수한 점을 남겨 놓지만 죽으면 점 하나도 남겨 놓지 못하고 소멸할 거면서.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기묘한 연대를 시작한다. 『최단경로』에서 미처 보여주지 못한 그들의 미래를 상상해본다. 애영, 마이레, 혜서로 연결되는 여성들의 공동체에는 삶을 시기하지 않는 민주 또한 포함될 것이라고. 존재하지 않은 샌더스 섬에서 진혁의 좌표는 사라진다. 그가 사랑해야 했던 마지막 목소리만을 세상에 남겨 놓은 채로. 『최단경로』는 묻는다. 당신은 존재하는가. 죽음은 이토록 선명하고 흔적은 오류투성이로 존재한다. 삶은 오류로써 기억될 뿐임을 『최단경로』는 말한다.

『최단경로』는 사건과 사건을 이어주는 긴밀성을 독자 스스로 찾게 만든다. 상상력 또한 발휘해야 한다. 누군가는 듣겠지만 누군가는 들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쏘아 올리는 미약한 신호 같은 소설. 죽음에의 최단 경로를 찾아가는 이들에게 경로를 무시한 채 꼭 한 번 만나자고 말하는 소설. 죽음은 망해가는 지구에서 이미 망해 버린 우주로 건너오는 단순 노동일뿐 무서워하지도 슬퍼하지도 말라는 묵묵한 위로를 『최단경로』는 숨겨 두었다. 내일도 눈을 뜨고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뛰겠지만 점과 점, 그러니까 그 일은 삶에서 죽음으로 직선을 긋는 일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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