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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나 도쿄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정현 지음 / 스위밍꿀 / 2019년 1월
평점 :
쓸쓸한 이야기 한 편을 읽었다. 좀처럼 눈을 볼 수 없는 남쪽에서 읽는 눈 이야기가 가득한 소설. 첫눈이 왔다고들 하는데 이곳은 아직 소식이 없다. 창문을 열면 약간 흐릿한 하늘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한정현의 『줄리아나 도쿄』는 자신의 인생에서 한 번도 선택이라는 걸 해본 적 없는 인물들의 서사가 담겨 있다. 한주와 유키노. 서로의 등을 바라보며 걷는 그들에게 아직 오지 않은 첫눈에 대한 기대를 들려주고 싶다.
한주는 청강생 신분으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다. 소설 읽는 것이 좋아서 시작한 공부였지만 공부를 더 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같은 공부를 하는 애인에게서 일상적으로 폭행을 당한다. 남들 앞에서는 웃지만 한주에게만은 차갑고 무참한 그에게서 벗어날 길이란 없다. 그날도 폭행을 당하고 한주는 목에 샤워 호스가 감긴 채 발견된다. 깨어난 한주는 한국어를 잃어버렸다. 외국어 증후군을 앓고서 일본으로 떠난다. 그녀에게 남아 있는 언어란 공부 때 읽은 일본어 뿐이었다.
서점에서 유키노를 만난다. 눈의 요정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남자. 성소수자이고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로 인한 유대감으로 함께 살아간다. 유키노에게도 폭행을 일삼는 애인이 있었다. 한주와 이름 한 글자가 다른 한수. 유키노와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수에게서 한주를 보호하고자 유키노는 집을 떠난다. 『줄리아나 도쿄』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이렇다. 소설의 서사는 전부를 말하지 않고 자주 끊긴다. 인물이 가진 배경에 몰두하기보다 그들이 현재를 살기 위해 겪어야 했던 과거를 추측해야 했다.
국적을 초월한 여성 노동자로서의 삶. 과거와 현재는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배척받으며 한곳에 뿌리내리지 못한 여성의 삶을 교차함으로써 한정현은 묻는다. 자신의 삶에서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했느냐고. 한국어를 잃어버린 채 아무도 없는 일본에 와서 삶을 시작하는 한주를 통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여성의 시간을 보여준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줄리아나 도쿄'에 모여 춤을 추는 여성들이 있었다. 스스로의 삶에서 주인공이 되어본 적 없는 여성이 무대에 올라 춤을 춘다. 그곳에서만큼은 그녀들은 주인공이 된다.
『줄리아나 도쿄』는 여성, 성소수자, 데이트 폭행, 노동자, 문학, 시위, 전공투 같은 다양한 소재를 소설 안에 담는다.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쓸쓸함을 그린다. 과거는 잘못 끼운 필름으로 찍은 사진처럼 번져 있지만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어 하는 이에게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는다. 누군가는 자신의 삶이 오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책임을 타인에게 묻기도 하지만 겨울의 눈은 알고 있다. 잘못을 덮을 순 있지만 가려지진 않는다는 것을.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의 열패감을 『줄리아나 도쿄』는 담담하게 읊조린다. 실패라고 규정지을 순 있어도 패배라고 부를 순 없다. 한주는 입을 닫지 않는다. 말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린 대로 다시 배우며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좋은 것들은 미래에 더 많이 있다고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한정현은 이렇게 작가의 말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미래. 내일. 다음. 이토록 근사한 말을 어둠 안에 숨겨둔 『줄리아나 도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