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캐럴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8
하성란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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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해가 기우는 시간에 엎드려 읽던 하성란의 『삿뽀로 여인숙』을 기억한다. 학교에 가야 했는데 가지 않고 낮인지 밤인지 모를 정도로 어두운 방에서 읽었다. 몇 개의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면 나오는 방이었다. 그 방에서 많은 책을 읽었다. 하성란의 소설을 좋아했는데 촘촘한 문장으로 쓰인 느리게 흘러가는 서사가 인상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였다. 『삿뽀로 여인숙』은 두 번 읽었다. 좀 더 이해하고 싶었던 마음에서 그랬다. 그 뒤 신간이 나오면 바로 읽었다.

최근에 나온 소설 『크리스마스캐럴』을 읽으며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소설을 향한 고군분투의 시기. 묘사와 서사 사이에서 갈등하며 어떤 것을 취해야 할지 모를 때 읽던 하성란의 소설. 이제는 서사 쪽으로 기울었구나. 오대양 사건을 그린 『 A 』부터 그런 조짐이 보이긴 시작했다. 소설은 『나사의 회전』의 첫 문장을 변용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막내의 이야기를 듣는 크리스마스이브가 배경이다. 세 자매는 둘째의 "우리 밥은 먹고삽시다"라는 전화로 모인다. 소설의 화자인 첫째인 '나'는 남편과 함께 대형 마트에 장을 보러 간다.

그곳에서 이제는 더 이상 크리스마스에 캐럴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한다. 저작권 문제이지만 캐럴을 틀 수도 있는데 캐럴이 들리지 않는 마트 안에서 직원들은 산타 모자 하나씩을 쓰며 물건을 판다. 남편과 나는 비정규직 중에서도 가장 말단에 위치해 있을 인력 파견 사원으로 마트에서 쓰고 싶지도 않은 모자를 쓰며 일하고 있을 지인을 떠올린다. 세상 공평하고 누구라도 축복을 내려줄 것 같은 크리스마스에 돈 때문에 캐럴을 들을 수 없는 혹독한 자본주의 사회의 이상한 얼굴을 마주한다.

이야기는 장을 보고 케이크에 초를 불며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라는 체념을 숨기며 가족이 둘러앉아 조촐한 파티를 여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작가인 '나'가 썼던 크리스마스 관련한 소설의 내용을 이야기하고 사는 것이 만만치 않은 막내의 기이한 '10박'의 사연을 듣는다. 남편 김과 헤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난 열흘간의 이야기는 그들을 '숨죽이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태원 술집 사장의 돈을 얻을까 하는 욕심에 막내의 남편은 그곳에서 매일 술 파티를 연다.

막내는 술에 취해 두 남자가 운전하는 차에 태워진다.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지만 있지 않을 것도 같은 리조트를 향해 달려간다. 리조트는 존재했고 그곳에서 막내는 열흘 동안 지낸다. 커튼 없는 방에서 아침을 맞고 교인들 속에서 밥을 먹는다. 조리사들에게 은근한 멸시를 받기도 한다. 수건을 수거하고 커튼을 달아주겠다는 리조트 직원을 기다려 보기도 하지만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막내의 부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처음 리조트에 온 날 막내가 본 버섯 모양의 지붕은 떠나는 날 무덤으로 변해 있었다.

실제로 그곳에 머물렀던 것인지도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막내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열흘간의 격리 속에서 막내는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뒤섞이는 경험을 한다. 거짓말은 현실이 되어 돌아오고 진짜로 본 것이라 믿었던 것은 가상이 된다. 『크리스마스캐럴』은 유령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사실 죽은 자들과 함께 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혹독하게 돈을 아끼며 살아간 스크루지 영감이 본 것은 유령이 아닌 지금의 삶을 바로잡아줄 진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산다는 건 이상한 일들의 연속이다. 과학과 논리로 해석할 수 없는 서사가 펼쳐진다. 세 자매 중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막내가 겪은 기이한 '10박'은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희망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우리를 숨죽이게 하는 건 유령이 아닌 살아 있는 자들이 연출하는 기괴한 속임수다. 속고 속이고 속은 척하는 난장판에서 각성한 자만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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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efilm 2019-11-1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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