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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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란 무엇일까.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다. 철모르는 소리였다. 일하지 않고 평생 놀고먹을 순 없을까.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일을 하다가 지쳤다. 1년을 쉬었다. 다시 일을 해야 했다. 통장이 텅장이 되어 가고 있었으니까. 일이 없어 생기는 불안한 마음과 줄어드는 통장의 잔고의 기억 때문에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 쉬엄쉬엄해. 헌신하면 헌신짝처럼 버려져. 이런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선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고 생각.

일이란 중독과 같아서 한 번도 일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일해본 사람은 없다. 꼬박꼬박 제날짜에 들어오는 월급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그 기분을 잊을 수 없어서 내일도 중독자처럼 눈이 풀려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선다. 나처럼 열심히 산다는 생각을 넘어 착각에 빠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일은. 이제는 일하지 않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일하지 않으면 좋아하는 편의점과 빵집에도 갈 수 없고 카카오 프렌즈의 귀염둥이 라이언 제품도 살 수 없으니까. 알람이 울리면 씻는다.

김혜진의 장편 소설 『9번의 일』에는 통신 회사에서 26년 동안 일한 남자가 나온다. 끝까지 그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가 소설 안에서 최종적으로 부여받는 호칭은 9번이다. 9번이 되기까지 남자는 회사로부터 굴욕과 모욕과 소외를 받는다. 수리, 설치, 보수 업무를 담당하는 그에게 회사는 재교육 대상자라는 통보를 해온다. 그 말은 조금 더 줄 테니 퇴직금을 받고 나가라는 뜻이었다. 남자는 거부하고 교육을 받는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강의를 듣는다. 회사를 그만두지 못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서 다세대 주택을 매입했고 곧 대학에 들어갈 아들의 교육비도 마련해야 한다. 차 할부금도 남았고 시골집의 공사비도 드려야 한다. 나이가 있다는 모종의 압박을 받았다고 해서 네 알겠습니다 하고 회사를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회사의 요구를 거절한 남자에게 닥치는 살벌한 일들을 『9번의 일』은 그린다. 드라마 <미생>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회사가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다." 남자는 전쟁터에 남아 끝까지 싸워 보겠다는 마음으로 회사에 남는다.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소외뿐이다. 인간에 대한 존엄은 사라진다.

남자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영업일이 주어진다. 공장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내려가 제품을 판다. 남자는 어떡하든 업무에 복귀하고 싶어 모욕을 감당한다. 결국 이름이 아닌 9번이라는 호칭을 받기까지 한다. 일은 단순히 업무를 익혀서 월급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사람도 세상도 들어 있는 것이다. 남자가 회사로부터 부당 전출과 노골적인 퇴사 압박을 견디는 것은 일 안에는 그가 이룩해낸 세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을 하려는 남자의 결말은 어떻게 끝날까.

『9번의 일』은 노동이 주는 가치를 긍정적이고 따뜻하게 그리지 않는다. 9번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버티기를 통해 일이란 자신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음을 아무리 포장해도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챙기는 전리품 정도의 가치인 월급이 전부임을 이야기한다. 대단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지만 한순간에 밀려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지금의 일. 매번 이길 수는 없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9번의 일』은 역설한다. 좋은 일 나쁜 일이 따로 있나. 그저 하라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일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저 해야 하는 것이어서 이제는 당연하게 하고 있다. 일하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천국을 살았던 기억이 없다. 지옥에서도 꽃은 핀다. 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모욕 속에 두는 것이 아닌 지옥으로 걸어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해 보는 것. 『9번의 일』은 노동에 매몰되어 스스로의 이름도 지키지 못한 9번들에게 한 번쯤은 멈추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일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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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efilm 2019-11-1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월 22일 삼청동 과수원에서 열리는 김혜진 작가님 북토크 놀러오세요!!! https://booking.naver.com/booking/5/bizes/259106/items/3217897?preview=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