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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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으며 많은 부분에서 뜨끔했다. 그가 실수라고 먼저 밝히는 '결정 장애'라는 말로부터 시작해서 누군가를 웃기기 위해 행했던 행동과 순간이 부끄럽게 느껴진 것이다. '결정 장애'는 이것도 저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자신을 지칭할 때 흔히 쓰던 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이고 장애라는 말에는 '부족함, 열등함'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한 개인은 다양하게 정의 내릴 수 있다. 그것을 특정 성별로 단순하게 구분 짓거나 직업적인 분류로 나눌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쉽게 얘기하곤 했던 여자는 이래야 한다든가 남자는 저래야 한다는 이분법의 시각을 버려야 한다. 여성이면서 학생일 수 있고 주권을 가진 국민일 수 있는 것이다. 사회가 합의하는 평등의 관점에서 벗어나야 함을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말한다. 처음부터 우리는 평등할 수 없다. 평등하다고 믿는 자신이 있을 뿐이다. 평등하지 않다고 여기게 되는 순간 맞게 될 불안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속한 사회는 정의롭다고 믿는 것이다.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권을 공부하고 차별을 연구하는 저자조차도 그 말이 차별의 언어인지 모른 채 썼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라는 말로 차별의 문제를 밝혀 나간다. 흑인 분장을 하고 흑인을 비하하는 개그를 할 때 누가 웃는가가 아닌 누가 웃지 않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개그를 할 때 누군가를 웃길 생각만 했지 누가 웃지 않고 슬퍼할지를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나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불편한 시선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편견을 가지고 현상을 들여다보려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별을 당했다는 기억이 있었지 차별을 했다는 순간을 떠올리지 못하고 살았다.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쌓일 때 우리는 차별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외모와 성별로. 출신 지역과 학교로. 부모의 존재 여부로.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나의 피해 망상은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었다. 아니었다. 이 부분을 읽고 나서였다.

어빙 고프먼은 부정적인 고정관념인 낙인이 내면화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한 결과, 사회가 부여한 낙인을 자신 안에 내면화하고, 스스로를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개인적인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굳이 타인들이 노골적으로 차별하지 않아도 본인들이 소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차별적인 구조가 유지된다. 차별을 받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부족하고 열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저항을 하지도 않는다.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中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차별을 받았던 자신이 절대 예민한 것이 아니었음을 오랫동안 견고하게 지켜져 왔던 차별의 역사를 열거하면서 위로해 준다. 국가와 사회, 집단이 행했던 고정관념이 우리를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만들었다. 최근의 시사 문제를 끌어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오랫동안 차별과 인권을 연구해온 학자답게 보편적인 상식을 풀어 놓는다. 누구라도 이해하고 호응할만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약자끼리는 연대가 가능하다? 그런 줄 알았다. 약자라고 스스로를 여기던 그들은 다른 지위를 가진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밝힌다. 우리를 열등하게 만드는 것과 열등함을 낙인처럼 받아들이며 살게 하는 것은 자신들은 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우리였다. 우리가 우리를 차별주의자로 만들었다. 내가 스스로를 평등과 정의의 세계에서 멀어지게 한 것이다.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리면 된다. 누가 웃지 않고 울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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