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주의 영화 - 공선옥 소설집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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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고 반가운 일이 하나 생겼다. 공선옥의 신간 『은주의 영화』가 나온 것이다. 행복한 기분으로 소설을 읽어 나갔다. 소설의 존재 이유를 말하는 듯한 여덟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가 궁금한 이들이 있다면 꼭 『은주의 영화』를 읽었으면 좋겠다. 그 안에는 우리가 살아오고 살아가야 하는 시간이 담겨 있다. 공선옥의 소설을 사랑한다. 사는 것에 시달릴 때 공선옥의 소설을 읽고 나면 그래도 살아야지 한 세상 울고 웃으며 살아내야지라는 의젓한 마음이 든다.

「행사작가」에서는 행사를 '뛰며' 살아가는 왕년의 소설가가 나온다. 소설은 쓰지 못하지만 예전에 써 둔 이야기로 지금을 버티는 그이에게서 진한 짠함을 느낀다. 이혼한 아버지에게서 양육비를 타내려는 현실에 일찍 눈을 뜬 아이는 「순수한 사람」에서 끝내는 순수함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소설은 순수하고 싶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들을 그려낸다. 「오후 다섯시의 흰 달」은 불의의 사고로 아들과 아내를 잃은 한 남자가 등장한다. 늙어가는 그가 바라는 것은 요리 레시피를 검색해서 밥을 해 먹일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표제작이기도 한 「은주의 영화」는 소중한 소설이다. 광주의 시간을 불러와서 진하게 한 판 굿을 벌인다. 카메라에서 튀어나오는 죽은 이들의 넋두리는 오래도록 잊히질 않는다. 역사라는 거대함에 함몰된 개인의 시간을 차근차근 풀어낸다. 상처로 가득한 세월이었다. 어떤 순간은 잊길 원했지만 끝까지 현재의 시간까지 쫓아왔다. 팍팍한 현실에게까지 미치는 과거의 악령을 은주는 떨쳐 낼 수 있을 것이다. 「염소 가족」은 가족이란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는지 모를 걱정으로 출발하는 소설이다. 가족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에게 바쳐진다.

「설운 사나이」는 쌍용 자동차의 시절을 다룬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나'와 자동차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그'의 시간이 만나면서 사는 건 대체 무엇인가를 묻는다. 「어머니가 병원에 간 동안」, 「읍내의 개」는 아직도 이런 소설을 쓴단 말인가. 그 시대는 이미 기억 속에서 저물어 버린 건 아닌가. 어쩌자고 그때 그 시간들을 붙잡고 있는가. 애가 닳는 소설들이다. 끝내 포기하지 않고 유년을 끄집어 내는 공선옥의 강한 힘에 붙잡힌다. 이토록 질기디질긴 생명력으로 가득한 소설을 써내는 공선옥의 손을 잡고야 만다.

첨단을 달리는 지금 공선옥의 소설은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가치를 일깨워 준다. 사람들은 한 번도 가난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시치미 떼며 근사하고 세련된 것을 찾는다. 우울한 이야기는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아프고 힘든데도 말이다. 소외되고 존엄성을 파괴 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은주의 영화』는 상처받은 우리들에게 온기를 전해준다. 돈과 사랑과 인간과 세상에 받은 잔인한 상처. 소설이 왜 필요한가. 우리가 모르고서 우리에게 준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은주의 영화』는 그 일을 기꺼이 해낸다. 공선옥의 소설은 긴 노래다. 끊어지지 않게 온 밤을 불러야 하는 노래인 것이다. 문장은 자유자재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고 서술자를 바꾼다. 이곳에서 시작한 노래는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기를 반복한다. 나는 소설을 읽어내며 살아간다. 소설이 있어서 사는지도 모르겠다. 공선옥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고등학생의 나는 이제 사는 것에 지쳐가는 어른이 되었다. 지치고 피곤한 기분이 들 때마다 공선옥의 소설을 회복제처럼 꺼내어 읽는다.

그이의 소설은 과거를 추억하고 미처 말하지 못한 사과의 말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은주의 영화』는 우리에게 과거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부끄럽고 무서워서 숨겨 두었던 시간을 꺼내 보일 수 있는 힘을 보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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