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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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의 소설은 문단을 잘 나누지 않는 형태이다. 대화도 문장 안으로 집어넣는다. 책을 펼치면 빽빽하다. 그럼에도 읽기 어렵지 않다. 술술 읽어 나갈 수 있는 이야기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사연을 넣어서 쓴 소설은 작위적이지 않으며 억지로 슬픔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이번에 나온 장편 소설 『상냥한 사람』을 꼭 읽어보시라. 실패와 좌절, 죽음의 이야기가 뭉쳐 있지만 살아갈 수 있다는 작은 용기가 솟아오른다.

어린 시절 엄마 가게에 찾아온 드라마 프로듀서의 눈에 띄어 아역 배우가 된 형민이 주인공이다. 드라마 속 이름인 진구로 한동안 살았다. 드라마가 끝나도 사람들은 형민이라는 이름 대신에 진구라고 불렀다. 그게 싫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진구라고 더 이상 불리지 않게 될 때는 서운하기까지 했다. 자신을 잊어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상냥한 사람』의 줄거리를 옮기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소설 안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 즉 사연들이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연이 모여 소설을 이룬다.

주로 사고와 죽음의 순간을 이야기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가지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사고의 순간에는 어쩌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 때가 있다. 어떻게 이겨 내야 할까. 『상냥한 사람』의 인물들은 주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때 어떻게 했더라면으로 시작하는 무수한 가정법을 실행하지 않는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기도 하지만 이제는 다 잊었다는 듯이 살아간다. 살아가는 동안 선택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상냥한 사람』은 선택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소설이다.

형민이라는 이름 대신 진구로 살아간 그때를 회상하며 시작하는 소설은 이야기와 이야기를 무수히 나열해 놓는다. 《인간극장》에 등장하는 우리 이웃이 경험했을 과거를 풀어 놓는다. 세상에 무슨 그런 일이 있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그 이야기 안에는 언젠가 내가 겪었을 시절이 담겨 있어 책을 읽다 말고 과거 속으로 역행해 들어간다. 사람에게는 한 번의 삶 밖에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야박하게 느껴진다. 『상냥한 사람』은 나에게 두 번의 삶이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상냥한 사람』은 인물의 이름에 대한 사연을 많이 소개한다. 마치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존재하기도 하는 것처럼. 사고를 당하고 불운이 닥치는 것이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남은 생을 쉽게 버틸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것이다. 누구를 탓해야 하나. 나에게 닥친 슬픔의 원인을 찾다가 이름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그렇게라도 해야 타인에게 '상냥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 상실을 경험한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소설 『상냥한 사람』.

소설을 읽을 때 천천히 읽었다. 기구한 자신의 삶을 담담히 말하는 것이 애써 슬픔을 눌러 보려는 움직임이 너무 빨리 지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들어주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살다 보니 의외로 사람들은 상냥하지 않았다. 상냥한 척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상냥함이란 대놓고 드러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 이름을 자주 불러주며 살아가는 것. 이 세계가 내게 부여한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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