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 개정판 한창훈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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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엄마 손을 잡고 어판장으로 갔다. 팔고 남은 잡어를 가지고 오는 게 일이었다. 생선을 들고 선주 집으로 갔다.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같은 돈을 몇 번이나 세어서 줬다. 고기가 안 잡힌다는 둥 하나 마나한 소리를 듣고 있어야 했다. 어찌어찌 돈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먼저 돈을 받아 갔다는 소리를 들으면 집에 와서 성질을 낼게 분명했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부엌 바닥에 앉아 생선을 손질하고 남은 건 주인집에게 주었다. 옷도 사서 입고 통닭집에 전화를 걸어 닭도 시켜 먹었다. 그 돈으로.

일이 없는 계절인 겨울에는 고대구리 배를 탔다(고대구리는 바다 밑바닥까지 훑어서 고기를 잡는 방식인데 지금은 하지 않는다. 어린 물고기까지 싹 쓸어오는 조업 형태이므로). 한 번 풍랑을 맞아 배가 뒤집힌 적도 있었다. 지나가는 어선에 의해 구출되었고 인근 섬에서 몸을 추스르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 일도 있었다. 한창훈의 산문집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의 서문은 '저는 당신이 바다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로 시작한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내가 바다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저 남해의 섬에 사는 소설가는 어찌 알았을꼬.

사실 나는 바다를 좋아한 적이 없다. 교실 창가에서 보이는 바다. 바람이 불어오면 짠내도 함께 밀려왔다. 칠판을 보는 것보다 창문 너머의 바다에 눈을 주고 있던 적이 더 많았다. 작은 배들이 통통통 지나가고 밤이면 약한 불빛이 번져 왔다. 실은 바다가 주는 돈으로 먹고살았는데. 그런 바다에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느 순간 그때를 잊고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바다는 일상의 배경일 뿐이었다.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를 읽어나가며 이제 막 잡은 생선의 싱싱함보다 먹기 좋게 손질한 횟감보다 눈이 가는 건 흑백의 바다였다(전자책으로 읽어서 모든 사진을 흑백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는 섬에서 태어나고 다시 섬으로 돌아간 소설가 한창훈이 쓴 21세기 신자산어보이다. 천주교 박해로 흑산도로 유배를 간 정약전은 그곳에서 수산생물 일지 『자산어보』를 쓴다. 200년 전의 기록은 21세기를 만나 다시 태어난다.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에서는 거문도, 백도, 여수 근처에서 잡히는 해산물 29종의 채취 방법, 조리법, 특성을 다룬다. 한 종이 더 있긴 한데 그건 해산물은 아니고. 한 번 읽어보시라. 신비한 구석이 많은 종이다. 섬사람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는 바다를 벗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생활을 담는다.

섬에서 섬으로 시집온 어느 여인의 이야기. 복국 끓이는 법을 배워 장사를 시작했지만 그것마저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의 애환. 갓김치를 싫어한다고 말했는데 몰래 갓김치를 넣은 할머니. 어렸을 때부터 바다낚시를 한 소설가의 회상. 미식의 세계를 탐하기 보다 바다와 해산물과 바람이 주는 풍성한 이야깃거리에 아슴푸레했던 그곳의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 손을 잡고 갈 때 느꼈던 긴장과 흥분. 돈을 주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해하는 엄마의 옆모습. 생선을 담은 봉지의 묵직함.

바닷가 근처에서 내륙으로 사는 곳을 옮겨오느라 바다 같은 건 생각해보지 않은지 오래였다. 누군가 올려놓은 여행지의 푸른 바다는 현실감이 없었다. 스노클링을 한다며 장비 일체를 사기도 하던데. 낚시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이 인기라 그 방송이 시작됨과 동시에 횟집에 전화 주문이 밀려든다던데. 나와는 별 관계도 연결 고리도 없는 소리였다. 그런데 어쩌랴.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는 기어이 기억 속 바다를 불러왔다. 내가 바다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문장으로 그리운 추억을 데리고 왔다.

엄마가 해준 밥상 위에는 늘 생선이 올라왔다. 생선은 혼자서 해 먹기 어려운 반찬임을 알았던 것이다. 나 혼자 먹자고 생선을 사서 손질하고 기름과 전투를 벌일 일은 없는 것이다. 조기, 갈치, 병어, 임연수가 종종 올라왔다. 서대 찜도.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의 표현대로 숟가락으로 생선 살을 퍼서 먹었다. 행복했지만 행복한지 모를 시간의 일이다. 강원도에서 시집온 엄마는 여기 사람들이 고등어를 생선 취급도 안 하는 걸 놀라워했다. 그 귀한 걸 다 버리더라.

냉장고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 미역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어떤이가 자기 생일이라고 하나씩 돌리길래 받아왔다. 제품의 특징을 읽다가 우스운 문장을 발견했다. '조리 시 약 20배 불어날 수 있습니다.' 그걸 읽고도 양 조절을 못해서 솥으로 끓여야 할 정도의 양으로 불려놨다. 사진을 찍긴 찍었는데 누가 보면 대식구가 사는 줄 알겠다. 큰일까지는 아니고 몇 날 며칠 먹으면 된다. 바다를 떠나왔지만 바다는 이렇듯 가까이에 있었다. 기억 속 바다의 내음을 맡으며 피를 맑게 해준다는 미역국으로 한 시절의 그리움을 달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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