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순간 포기했다. 과장된 웃음과 크게 떠들며 대화를 하는 나 자신이 참을 수 없었다. 타고난 유머감각이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애들은 내 꾸며낸 이야기에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거짓말쟁이라는 소문이 안 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수다쟁이 역할에서 빠져나왔다. 중심에서 주변부로 겉돌면서 좋게 말해서 침울한 아이가 된 것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못생기고 눈치 없고 인기 없는 흔한 캐릭터로 교실의 정물이 되었다. 그런 애들이 그렇듯 책으로 나약한 정신세계를 의탁했다.

아닌가. 좀 더 활발하고 의욕적인 취미 생활을 가지게 되는가. 모르겠다. 돈과 의지할 어른이 없는 내가 도피처로 삼을만한 것은 책이었다. 소설가 김영하가 방송에서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책을 읽으면 그 안에는 나보다 더 심한 아이들이 나온다고 그러면서 위안을 얻는 것이라고. 맞다. 내가 펼쳐든 이야기 세계에서 아이들은 자주 가출을 하고 학대를 받고 그럼에도 자아의 넓이를 확장했다.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보다는 환경을 극복하며 더 나은 인간이 되는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다.

꾸깃꾸깃해진 정신을 허구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겉으로는 멀쩡한 척을 할 수 있었다. 기초적인 사회화 기관은 가정이라고 하지만 내겐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었다. 내게 있어 낡고 허름하고 곰팡이 냄새가 나는 책들이 모인 헌책방이 사회화 기관이었다. 헌책방을 다니면서 나는 불안과 강박증, 결벽증, 조울증, 피해 망상의 크기를 작게 만들거나 감출 수 있었다. 오테사 모시페그의 소설 『아일린』의 주인공 아일린처럼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일정 부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방법을 책을 읽으며 배울 수 있었다.

책을 읽지 않았으면 독서라는 돈 안 들고 혼자만 할 수 있는 생활에 몰입하지 않았으면 나는 『아일린』을 읽으며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함수 문제와 방정식을 풀 수는 없어도 과거 분사와 현재 분사의 차이점을 설명할 수 없어도 나는 타인의 감정에 동요하고 연민할 수 있는 심약한 감성을 지닌 사람으로 살고 있다. 자신이 살았던 마을을 과거라는 형식에 묶어 두고 싶어 X 빌이라고 지칭하는 아일린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애틋해하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 어머니가 죽어가는 것을 봐야 했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의 수발을 들어야 했던 아일린. 그녀가 살아온 시간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내 아일린 도망쳐, 힘없는 응원을 했다.

스물네 살의 젊은 아가씨 아일린이 상처와 고통, 소외 속에서 살아야 했던 건 그녀 자신의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냉혹한 환경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머니, 아버지, 언니 그리고 그녀 아일린. 네 가족은 화목과는 거리가 멀고 연출된 평화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거의 요리를 하지 않는 어머니가 내온 음식이란 인스턴트뿐이었고 그걸 먹으면서도 싸우는 부모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악한 언니 조우니는 아일린과는 단호하게 선을 그은 채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내쳐진 아일린은 데스마스크로 감정을 감춘 채 살아간다. 어머니의 병간호를 핑계로 아일린을 불러들인 아버지는 아내가 죽고 나서도 그녀를 옆에 두고 학대한다.

전직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의 주선으로 소년 교도소에서 사무 업무를 보는 아일린. 그곳에서도 그녀는 냉대를 감당해야 했다. 함께 일한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인 동료들은 아일린에 대해 대체로 무심했다. 아일린은 랜디라는 남자를 맘에 들어 하는데 그는 아일린의 이름조차도 모른다. 술에 취해 아일린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아버지를 피해 랜디의 집 앞에 가서 상상 연애를 펼치고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며 살아가는 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는 첫 소설 『아일린』을 통해 한 인간에게 가해지는 세상의 온갖 폭력을 보여줌으로써 그럼에도 인간은 남에게 위해를 가하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아일린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미모, 근사한 남자와의 데이트, 다정한 부모, 패션 센스가 아니었다. 업무가 끝나고 만나자는 약속을 건네는 한 명의 친구였다. 아일린이라고 먼저 이름을 불러주고 시간이 괜찮냐고 묻고 이따 보자는 일상적인 말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인간적인 것을 바란다는 것을 드러내면 쉽게 상처받을까 봐 아일린은 X 빌에 살 때까지 어둡고 습한 얼굴을 유지해야 했다. 나는 아일린에게서 지나온 시절의 한 얼굴과 만난다. 호의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친절함에 간절히 굶주린 얼굴을. 내내 바랐다.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기를.

『아일린』은 노인이 된 한 인간이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지나온 시간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감정이 과잉되기도 한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에서는 새로운 인물을 투입해 긴장감을 불러와 읽는 재미까지도 선사한다. 과거는 참혹이었지만 그때를 회상할 수 있는 오늘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할 수 있다. 오테사 모시페그는 사람의 마음을 관통하는 인생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이 담긴 문장으로 소설 『아일린』을 끌고 나간다. 후반부로 갈수록 지치지 않는 서사의 힘을 보여주는 패기로 소설을 완성한다. 약간의 반전으로 독자의 심장을 쿵쾅거리게도 만든다.

나는 나였고 아일린은 아일린이었다. 각자의 인생이 한 권의 책에서 동일 선상에 놓였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시대와 언어, 국경을 초월한 우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스물넷의 아일린에게 내내 했던 말, 도망쳐는 내게 해주고 싶었던 소리이기도 했다. 도망쳐야 했지만 버티기로 했던 나에게 위로처럼 찾아온 『아일린』의 이야기를 당신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나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만큼 어둡지도 음울하지도 않다. 다만 그러한 감정에 대해 유난히 잘 알고 있을 뿐이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