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환상통 문학과지성 시인선 527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않아
-김혜순

음악이 없으면 걷지도 않아
레이스가 없으면 슬립을 입지 않아

때리면 피가 나는 드럼이 있어
맞으면서도 춤추는 데를 떠나지 않아

무너진 바다에 무너진 배 무너진 밤
무너진 배는 떠나지 않아

교황 아버지 앞에선 촛불을 들고 춤을 춰야 해
물 속에 비친 촛불은 흐르는 피를 닦지 않아

출렁출렁 고통밖에 없는 고통이 흐릿한 뼈를 일으키는 밤
이 생의 모든 내 얼굴이 나를 불러도 돌아보지 않아

물 속엔 메아리가 없어서 울지도 않아
내가 여기 없어도 나는 떠나지 않아

아직
않아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못한 애도가 있다. 밤에는 비에 오고 아침이면 해가 뜨는 곳. 간밤에 쏟아진 뇌우가 편지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말과 글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번번이 실패한다. 멀리 안부의 인사가 쏟아지고 작별은 아직.


날개 환상통
-김혜순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

그들은 말했다
애도는 우리 것
너는 더러워서 안 돼

늘 같은 꿈을 꿉니다
얼굴은 사람이고
팔을 펼치면 새
말 끊지 말라고 했잖아요
늘 같은 꿈을 꿉니다
뼛속엔 투명한 새의 행로
선글라스 뒤에는
은쟁반 위의 까만 콩 두 개

(그 콩 두 개로 꿈도 보나요?)

지금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걸어가면서 머리를 올립니다
걸어가면서 피를 쌉니다

그 이름, 새는
복부에 창이 박힌 저 새는
모래의 날개를 가졌나?
바람에 쫓겨 가는 저 새는

저 좁은 어깨
노숙의 새가
유리에 맺혔다 사라집니다

사실은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려 걷습니다
커다란 날개가 부끄러워 걷습니다
세 든 집이 몸보다 작아서 걷습니다

비가 오면 내 젖은 두 손이 무한대 무한대

죽으려고 몸을 숨기러 가던 저 새가
나를 돌아보던 순간
여기는 서울인데
여기는 숨을 곳이 없는데

제발 나를 떠밀어주세요

쓸쓸한 눈빛처럼
공중을 헤매는 새에게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들어오면 때리겠다고
제발 떠벌리지 마세요

저 새는 땅에서 내동댕이쳐져
공중에 있답니다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닙니다
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오늘 밤 나는
이 화장실밖에는 숨을 곳이 없어요
물이 나오는 곳
수도꼭지에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위로해주는 곳
나는 여기서 애도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 날개를 들어 올리듯
마스카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면

타일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떠밉니다

내 시를 내려놓을 곳 없는 이 밤에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쓰레기통을 비우다가 그 사람이 있었지, 잠시 머물다 갔지 하는 환상통. 목소리와 체취를 알 수 없는 시간으로 살고 있다. 새가 되기 어려울까 내가 되기 어려울까. 푸른 지붕 위에 모여 앉은 불만의 감정이 날아오른다.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그는 설계해 놓고 날아갔다. 새도 나도 내일은 모를 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