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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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레이코의 말인 '기억의 잔존'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왜 이 책의 내용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예전의 나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한 텔레비전 광고에서 『상실의 시대』를 읽는 장면을 시작으로 닥친 하루키 열풍에 나도 동참했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었는데 국내에 들어오면서 다시 지은 제목이 더 좋았다. 시대에 맞물려 책은 한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가 있었다.

그때로부터 얼마나 지난 것일까. 새롭게 옷을 입고 원래의 제목을 달고 나온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은 지금은 그때보다 색채가 진해졌다. 그래봐야 물을 조금만 섞은 상태로 그린 그림일 뿐이다. 의미를 알 수도 의도를 해석할 수 없는 난해한 그림 속 배경에 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인생의 어두운 면을 알면서 현명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저 예전이란 연필로 대충 그린 그림이었다면 지금은 어떤 색을 칠해야 알지 어렴풋이 아는 정도인 것이다.

하루키의 출세작-이라고 쓰지만 출세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노르웨이의 숲』의 줄거리를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요약하라면 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열일곱 살에 삶의 굴절을 한 번 겪은 와타나베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서사란 중요하지도 대단하지도 않다. 와타나베와 나오코 그리고 미도리가 겪어내는 청춘의 시절을 따라가는 것으로 독자의 역할은 다 한 것이라 생각한다. 마음속에 꽉 차 오르는 생의 슬픔과 견딜 수 없는 의문의 죽음 앞에서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 나간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에 나는 죽음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죽음은 멀었고 익명이었고 대부분 타인으로 이루어졌다. 인간관계가 풍성한 시점도 아니어서 죽음은 뉴스에 나오는 다른 세계의 일이었다. 그때보다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노르웨이의 숲』을 읽은 지금은 적어도 죽음의 빛깔이 어떤지 남아 있는 사람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생의 그림을 그려야 할지는 안다. 와타나베와 나오코, 미도리가 겪어낸 죽음 앞에서 그들이 애도하는 모습을 보며 별일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가는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란 희망과 용기, 긍정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예감의 열일곱에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가장 가까운 친구인 기즈키를 잃었다. 기즈키는 와타나베와 당구를 치고 헤어진 그날 자살을 했다. 누구도 이유를 알지 못한 죽음이었다.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대체 그가 왜라는 질문만을 하며 살아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대학에 들어와 우연히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조우했고 서로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시내를 걸어 다녔다.

서른일곱 살의 와타나베는 비행기 안에서 들려오는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며 18년 전의 그날들을 떠올린다. 부디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나오코의 말과 함께 말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지냈던 시간들의 벌이라도 되는 듯 와타나베는 한순간 그 시절로 빨려 들어간다. 기즈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정리하지 못한 채 대학이라는 공간으로 둘은 내동댕이쳐졌다. 와타나베는 견디는 쪽을 택했고 나오코는 버티다 도망가는 것으로 죽음과 무관해지려고 했다.

시간은 착실히 흐른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방황과 좌절, 불안의 고통을 살았던 시간은 지나간다. 부끄러울 정도로 한심한 자신을 그저 지켜보는 것으로 말이다. 매일 실수를 하면서 살아가는 자신을 견뎌 주는 것. 죽음을 겪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살아가는 것이 아닌 지켜보고 견딘다. 『노르웨이의 숲』은 죽음이 남긴 상실 앞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한 사람의 처절한 기록이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 세계에서 버티기로 선택한 그의 시대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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