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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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고 감추고 싶은 자신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주는 누군가를 만날 때가 적어도 한 번은 있다. 적어도 한 번이라고 했지만 운이 좋으면 두 번, 세 번이 될 수도 있다. 부자거나 자신감에 넘치는 경우가 아니어도 된다. 불 꺼진 인도 쪽으로 걷고 눈을 맞추지 못해 시선이 불안정하고 말을 할 때 끝을 맺지 못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누군가를 만난다. 이름을 불러 이쪽 세계의 빛으로 데리고 오는 누군가를. 앤드루 포어의 단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주인공 헤더가 그러했다. 방정식 문제를 푼 유일한 학생으로 물리학과 종신 교수인 로버트에 의해 빛의 세계로 끌어올려졌다.

방정식의 풀이는커녕 방향조차도 잡지 못한 헤더는 A 학점 대신 로버트가 끓여주는 차를 얻어 마시게 된다. 로버트는 물리학을 헤더는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로버트가 헤더 보다 서른 살이 많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구성이 아니다. 그들은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 테이프를 들으며 주변부를 더듬고 중심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돌입한다. 헤더가 로버트에 로버트가 헤더에게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이후에 헤더는 의대생 콜린을 사귀지만 그에게도 그들이 가지는 만남의 사정을 말하지 못한다.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사건의 현상과 이론의 개념을 밝히는 일을 시시때때로 우리는 할 수 있을까.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묻는다. 당신 자신에 관한 기억을 떠올릴 때 그것은 인과 관계가 완전한 서사인가라는. 똑똑한 동기생 두 명조차 포기한 방정식 문제를 왜 끝까지 풀고 있었으며 평소에는 사적인 대화도 주고받지 않은 교수 옆을 지키고 서 있었는지. 십 년이 지난 지금 헤더는 그때를 기억하면 왜라는 물음만 할 뿐이다. 소설은 헤더 자신이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형식을 취한다.

'로버트가 마침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가을 학기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였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을 시작하는데 이 문장은 헤더의 질문에 답이 될 수 있는 문장이다. 마침내라고 쓰면서 헤더는 로버트와 앞으로 어떤 사건으로 엮일 것을 기대 혹은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이 방정식 문제를 요리조리 답만 피해 가면서 푼 시간 이후가 된 것일 뿐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인생의 우연을 설명하는 뻔한 잡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연은 필연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사건으로 당신 앞에 짠하고 나타나며 삶을 살아갈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준다.

로버트와 헤더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인간이 나눌 수 있는 가장 사소한 인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이로 되어가는 우연에 처했다. 헤더는 그 시간을 소중히 받아들이며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물리학, 영화, 가족, 친구, 아내, 별거라는 주제로 어둠에 묻힌 나들을 지상으로 끌어올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인간적인 거리감을 유지한 채.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이 두 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중요한 나의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었다.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中에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나라는 서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그 누구도 아닌 나라고 말하는 소설이다. 빛이 물질에 닿을 때 반사하거나 통과하는 이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화학 작용이 일어났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마주하며 발견한 이론의 명제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풀이의 해석과 답을 구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 충돌할 때 어떤 마음은 비껴가고 어떤 마음은 그대로 관통한다. 관통당한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주일에 단 하루의 기억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그 시간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쓰인 시험지를 보고 헤더는 사랑이었습니다고 풀이를 작성한다. 익숙하고 아름답게 느꼈던 존재의 실체를 깨닫는 순간 로버트는 차 한 잔을 마실 이유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로버트는 나이가 들면 도전이 아닌 피로감이 든다고 말한다. 늙어가는 물리학자는 자기 너머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을 갖게 된다면서. 로버트는 방정식의 답을 쓰는 사람이 아닌 풀이를 구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헤더는 삶을 살아가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헤더를 발견함으로써 로버트는 인생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실체를 찾을 수 있었다. 살아왔고 살아갈 난제의 답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비어있는 마음을 향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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