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인기척 이규리 아포리즘 1
이규리 지음 / 난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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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겠다고 책상에 앉아 연필을 굴리던 일이 떠오른다. 시험지 정답을 맞히는 일도 아니었는데 연필을 굴리며 시간을 보냈다. 단 한 줄의 문장도 적지 못한 무수한 밤의 기억은 차라리 사랑스러웠다. 시집에 밑줄을 긋고 한자가 있으면 밑에 조그맣게 음을 달았다. 타국의 언어를 해석하는 일처럼 시를 읽었다. 남들과는 다르고 싶은 마음에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시를 읽는 척했다. 시는 모자란 나의 현실을 가려주었다. 매일 시 쓰기에 도전한 적이 있었고 1월 1일이 되면 마음이 상해 떡국을 들이 마셨다. 나이를 먹는 일보다 시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두려웠다.

나이를 먹고 시에서 멀어졌다. 두려운 일이라 여겼는데 별 느낌이 없었다.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쓴다. 이규리의 아포리즘 1권인 『시의 인기척』에서 시인은 시를 이렇게 정의한다.

시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실패이다. 머묾이 아니라 떠남이며 설렘이 아니라 무너짐이다. 정확히 그 지점이 시가 나오는 곳이다. 시는 그것들을 일으키려 애를 쓸 것이며 동시에 어떻게 아름답게 쓰러지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이규리, 『시의 인기척』中에서)

『시의 인기척』은 시가 되지 못한 문장을 묶은 책이다. 어떤 글은 시가 되기도 하는데 공책에 쓰인 어떤 글은 그 세계에 갇혀 있다. 이규리는 갇혀 있는 문장을 한데 모아 세상에 내놓았다. 시가 되지 못한 글은 더 많은 것이라 예상한다. 시의 실패가 되고 무너진 자리에 쌓인 글은 세상의 빛을 끌어안는 방식으로 시가 되어 나왔다. 한 문장이 적혀 있는 책의 여백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진 자의 슬픔 때문이다. 시에서 멀어졌지만 글을 읽는다는 관념은 중요하다.

책상에 앉는 것보다 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더 막막하다. 살기 위해서. 돈을 벌고 밥을 챙겨 먹고 나 아닌 다른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시의 인기척』에는 시를 쓰기 위해 실패했던 무수한 시간이 쌓여 있다. 실패이자 견딤의 기록인 것이다. 시를 쓰지 않는 순간에 시는 다가온다.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다가 산책 나가 개를 만나다 가도 시의 기척이 느껴진다. 모든 순간에 찾아오는 시의 여린 마음을 스쳐보내지 않기 위해 이규리는 쓴다.

사막은 산악지역보다 더 많은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다. 당신이 무표정하거나 침묵할 때 더 많은 마음을 숨기고 있듯이. 혹은 그것이 더 많은 발화이듯이.
(이규리, 『시의 인기척』中에서)

알 수 없는 병증으로 앓고 있는 당신에게 『시의 인기척』을 건넨다. 많은 말을 하기보다 한 문장이 한 단어가 병을 낫게 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으므로. 현재를 사는 이유는 과거를 잊기 위함이고 미래를 견디는 일이다. 『시의 인기척』은 이해하고 오해하고 화해하며 견뎠던 시의 시간에 찾아온 다정한 안부 같은 책이다.

잘 있지? 이제 그만 아파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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