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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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먼로의 소설 『거지 소녀』는 나를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유년으로 데리고 간다. 온전한 추억이 될 수 없었던 겨울의 날들이었다. 그 시절의 경험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말해질 수 없다면 글로는 쓸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 시절을 글로도 쓰지 않았다. 기억의 벽장 안 맨 아래쪽에 접어 두었다. 기쁘고 좋은 일로 덮어 두었다. 그런 일들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기에 시도 때도 없이 기억은 들춰졌다. 나는 떠올리지 않았는데 문학이 소설이 시가 기억을 데리고 왔다. 『거지 소녀』를 읽으며 내내 겨울이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로즈. 『거지 소녀』의 주인공. 온타리오주 핸래티에 있는 상점 뒤편에서 아버지, 새어머니, 이복동생과 사는 여자아이. 『거지 소녀』는 로즈가 새어머니인 플로의 주도 아래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장엄한 매질」은 로즈의 가족사를 간단하게 보여준다. 로즈가 이복동생 브라이언에게 가르친 험한 말에 대한 추궁에서 시작된 플로와의 신경전은 결국 아버지까지 개입하게 만든다. 매질이 장엄할 수도 있음을 로즈의 아버지는 보여준다. 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한 매질이었다.

겨울에 엄마가 집을 나갔다. 엄마가 나가자마자 아빠는 여자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미술대학에 다닌다고 했던 첫 번째 여자는 질투심이 심했다. 그때 나는 만화로 된 성교육 책을 한 권 구해서 읽고 있었다. 2차 성징이 시작되면 생기는 몸의 변화를 코믹하게 다룬 책이었다. 단지 성(性)이라는 글자가 있다는 이유로 나를 이상한 애 취급했다. 여자는 내가 읽으면 안 되는 책을 읽고 있다고 아빠에게 말했다. 자고 있던 나는 몸이 들려져서 맞았다. 먼저 뺨을 세차게 맞았다. 너무 아파서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무슨 책인지도 모르면서 여자 말만 듣고 어린 딸을 때린 아빠와의 신뢰 관계는 깨졌다.

「장엄한 매질」을 당하면서 로즈는 성장한다. 『거지 소녀』는 단편 열 편이 모두 한 이야기를 이룬다. 각각 따로 읽을 수도 있는 소설들은 하나로 모인다. 시골 마을에서 여자아이로 살아가는 주인공을 통해 앨리스 먼로는 삶의 낭만이란 없음을 차분하게 그려낸다. 낭만이 무언가. 간신히 유년을 지나왔지만 청소년기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좁은 시골마을에서 도덕성, 정의, 용기 따위는 변소에 쌓인 똥보다 못한 존재이다. 아이들은 순수함과 동심의 상징으로 볼 수 없다. 그들은 자신보다 약한 존재가 나타나면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특권」에서 남매간에 행해지는 불온한 놀음은 한 사람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로즈는 그런 상실과 변화에 크게 영향받지 않았다. 그녀가 배운 바에 의하면 인생이란 대체로 놀라운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앨리스 먼로, 「특권」中에서, 『거지 소녀』)

로즈가 살면서 겪는 놀라움이란 부끄럽고 기막힌 일들로 인한 것이었다. 유행가 가사처럼 행복하자고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인생은 어느 방향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불행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아침에 무얼 먹냐는 교사의 물음에 로즈는 기발함을 가장한 거짓말을 한다. 자몽 반 개를 먹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몽 반 개」에서 로즈는 흉악한 아이들 틈에서 버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인기 있는 애에게 사탕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 실제 앨리스 먼로는 시골에서 자랐고 책을 좋아했다. 좀 더 나은 세계로 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읽는 것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앨리스 먼로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해서 장학생으로 대학에 간다. 로즈 역시 상점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책을 읽는다.

『거지 소녀』는 로즈를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되지만 그녀의 새어머니 플로와의 사건도 중요하게 다룬다. 열두 살 때 플로는 다른 집으로 보내진다. 학교를 보내달라는 조건이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열네 살이 되기 전에 도망쳐 핸래티에 있는 장갑 공장에서 일했다.

아버지에게 플로는 바람직한 여자의 전형이었다. 로즈는 그것을 알았고 실제로 아버지도 자주 그렇게 말했다. 여자는 활달하고 현실적이어야 하며 무엇을 만들거나 비축하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빠릿빠릿해야 하고 흥정과 관리에 능해야 하며 사람들의 가식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지적인 면에서는 어수룩하고 아이 같아야 하며, 지도가 긴 단어나 책에 나오는 모든 것을 우습게 보고, 아기자기하면서 알쏭달쏭 한 생각, 미신, 전통에 대한 믿음 등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앨리스 먼로, 「자몽 반 개」中에서, 『거지 소녀』)

영리하게도 앨리스 먼로는 『거지 소녀』를 여성주의 소설로도 성장 소설로도 읽을 수 있게 곳곳에 암시들을 배치해 놓았다. 플로의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면 여성주의 소설로. 로즈의 인생을 따라가면 성장 소설로. 어떻게 읽느냐는 독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앨리스 먼로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들면서 다채로운 세계관을 소설에서 보여준다. 폐쇄적인 마을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작가 자신이 살아내야 했던 경험을 아프지 않게 소설로 복원해낸다.

공장 지대의 마을이었다. 옆집과 앞집의 경계가 없는 곳이었다. 어린이날이 되면 이웃집의 아무나와 손을 잡고 놀러 갔다. 그 안에서 잘 보이고 싶어서 잘난 척을 하고 싶어서 나는 거짓말을 했다. 학교가 끝나면 무얼 하냐는 질문 끝에 영어 과외를 한다고 했다. 로즈가 아침으로 자몽 반 개를 먹는다고 말한 것처럼. 한 번만 다시 생각하면 거짓말일게 뻔한 말을 해댔다. 마을에 사는 아이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다. 부끄러움보다 무시가 두려운 시기의 일이었다.

유년은 완성되지 못한다. 로즈는 나이를 먹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녀가 사는 마을로 돌아가 플로와 잠시 지내기도 한다. 소설은 로즈의 일생에 나의 유년과 지금을 겹쳐 놓는다. 로즈의 시간을 따라가면서 펼쳐지는 기억의 어두운 저편은 나를 쓸쓸하게 만들어 놓고야 만다.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그게 어떤 책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무턱대고 때린 남자를 떠올리게 했고 거짓말로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뻔뻔한 꼬마를 기어이 불러냈다.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혀 갖추지 못한 결합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
(앨리스 먼로, 「섭리」中에서, 『거지 소녀』)

『거지 소녀』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부끄러움에 관한 소설이다. 거짓말을 해서 위악을 떨어서 아픈 타인을 모른척해서 나를 나답게 만들지 못해서 가져야 했던 부끄러움을 농밀하게 표현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사랑을 받으며 자랄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한 로즈에게 연민을 느낀다면 당신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내내 어둡고 슬프고 절망으로 둘러싸인 채 살아왔다는 증거이므로. 시를 베껴 쓰면서 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질문하던 미스 해티의 진심까지 헤아리려고 한 로즈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이다. 아무것도 아니라서 그 무엇이든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순간을 문학으로 이겨낸 앨리스 먼로. 버티기 싶어서 책을 읽고 장학생이 되어 마을을 떠난 로즈. 그건 오해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 맞고 거짓말로 가난을 감추고 싶었던 나. 우리들은 『거지 소녀』의 세계에서 조우한다. 국경을 넘고 언어의 장벽을 부수어 세계라는 문학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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