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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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글쓰기는 밝은 탁자 위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과의 단절, 고독이라는 깊은 어둠을 거쳐서만 비로소 그것은 나타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장들은 단숨에 우리의 시선을 낚아채지만 어떤 문장들은 서서히 그 속에 스며들 것을 요구한다. 그런 세계에 들어서기 위해 우리가 견뎌야 하는 것은 어둠이라는 시간이다.
(장혜령, 『사랑의 단상들』, 「어둠이라는 권리」中에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책과 함께 한다. 눈 뜨면 전날 읽었던 책을 펼친다. 현실로 돌아오기 위한 워밍업. 전자책 리더기로 책을 읽은 뒤부터는 몇 시간이고 어둠 속에 누워서 책 읽기가 가능해졌다. 두꺼운 책을 들고 있느라 손목이 아프지도 않다. 암막 커튼 아래에서 게으르게 문장을 훑는다. 바깥세상의 안위는 잊은 채 이야기를 따라간다. 종종 어둠 속에서 읽은 책은 빛이 들어오는 순간 탁, 하고 꺼져 버린다. 서사는 희미해지고 문장은 휘발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힘을 얻으려는 것이다. 


장혜령의 산문집 『사랑의 단상들』을 읽는 내내 내 방의 불은 꺼져 있었다. 웬만하면 형광등을 켜지 않는 방. 스탠드 불빛 아래이거나 그마저도 꺼져 있는 방에서 책을 읽었다. 십 년 동안 발표할 지면을 기약하지 않으며 쓴 글을 모았다고 했다. 작가가 되려는 마음은 있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으리라. 세상으로 내보내기에는 완벽하지 않은 글. 여행의 기록과 일상의 기억을 모아 문장으로 썼을 그 방도 내내 어두웠으리라. 『사랑의 단상들』은 사랑이란 주제로 묶어가는 끝나지 않은 시다. 에필로그로 글은 끝나지만 사랑의 속성처럼 이 책은 끝나지 않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 혼자라서 가능 한 일. 그럼에도 외롭지 않은 일. 책 읽기는 광활한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빛 속에서 책을 읽었다, 그동안. 문장을 이야기를 놓칠까 봐. 이해가 안 되면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이제는 안다. 이해한 것보다 놓쳐버린 이야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고 있음을. 어떤 문장은 종이 위에서 번져가는 걸 지켜보기만 해도 흘러간다는 것을. 『사랑의 단상들』을 읽으며 전부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좋았지만 전부를 사랑할 순 없었다. 사랑의 정의를 찾아가는 『사랑의 단상들』은 흑백 처리된 과거를 불러왔다.

 

지나고 나면 사랑이었다. 우리의 순간은. 그걸 모른 채 살아가고 죽는다. 죽으면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로 건너온다는 말이 좋았다. 그렇게 우리의 세계는 만난다.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죽음을 정의하기에는 이 세계에서의 기억과 추억이 너무 많다. 일상을 견디는 힘으로 사진을 찍고 여행을 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의 추억과 시간의 잔상을 모아 기록한다. 써야겠다는 의식도 없이 여백에 채워지는 글 때문에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은 말하여질 수 없다. 그저 느끼다가 사라지면 수긍하는 것. 언젠가는 그게 있었지 하며 떠올리는 것. 『사랑의 단상들』은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슬프거나 기억의 덫에 빠질 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내가 알 수 없는 시간에 붙잡혀 후회하는 동안 읽었듯 당신도 원인 모를 무기력에 빠져 있을 때 읽으면 되는 책이다. 우리가 읽은 책이 본 영화가 걸었던 장소는 한 권의 책이 된다. 


출근길, 합정에서 당산으로 향하는 2호선 지하철 안에서 어린 남자아이를 보았다. 내 허리 높이보다 작은 키의 꼬마였다. 아이들은 언제나 갑작스럽다. 나는 전동차 문 앞에 서 있었는데 그 아이가 어느새 내 앞에 자연스레 끼어들어 있었다. 봄이었다. 바깥의 따스한 햇살이 문안으로 들이쳤다. 그 애가 유리 문에 입술을 맞추며 뭔가를 계속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향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다른 세계를 향해 교신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낯선 것이 우리를 호명할 때」中에서-


시시각각 나는 다른 세계로 불려간다
이곳에 있지만 이곳에 있지 않다

이 하루는 저 하루와 다르다

어떤 말은 듣지 않는 게 좋다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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