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신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0
손보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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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공상하기를 즐겨 한다. 책을 읽다 문득. 누워 있다가 한없이. 시간 낭비인데도 멈출 수 없다. 중독성이 있다. 미리 걱정하고 나름 방어책을 세우는 일. 가계부를 쓰고 있다. 이미 써 버린 돈을 적어서 무얼 하나 하다가도 계속 쓰게 된다. 한 번 형성된 습관을 쉽게 바꿀 수가 없다. 얼마 전에는 핸드폰을 바꿨다. 구형 핸드폰을 오래 썼다. 용량이 작아서 최소한의 앱을 깔아서 썼다. 은행 앱을 겨우 깔아서 필요할 때만 로그인을 했다. 급하게 돈을 보낼 때. 돈을 보내는 일만 자주 일어난다, 어찌 된 게. 지금 핸드폰에서는 수시로 은행 앱을 열어본다. 늘 그대로인 잔고를 들여다본다.

이번 달에는 얼마를 쓰고 다음 달에는 얼마를 써야 할지 고민해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닫는다. 쓸데없다, 이런 짓. 그래봐야 쓸 돈은 쓰고 안 쓸 돈도 쓴다. 고민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손보미의 소설 우연의 신에는 이런 근사한 말이 나온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라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하는 불안증 환자인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무거운 마음의 살을 줄여주는 일, 소설을 읽은 것은.

우연의 신은 망작이라고 여긴 조니 워커 화이트 라벨을 수거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민간 조사원의 행적을 그리고 있다. 손보미는 이 소설의 결말을 쓸 때 쾌감을 느꼈을 것 같다. 운명이란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가 된다.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다. 인간은 그저 앞과 옆, 뒤를 잘 보면서 살아가면 된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미리 겁을 낼 필요가 없다. 애를 써도 쓰지 않아도 불행한 일은 일어난다. 매 순간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게 우리의 운명이다. 하나를 선택해서 포기한다. 기회비용을 따지는 일은 우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이 낡고 비루한 세계에서는. 더 나은 선택은 없다.

정해진 규칙 대로 살아가는 민간조사원의 남자는 7년 동안 지킨 루틴을 깨고 일을 받아들인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테러가 일어나고 아는 사람들은 암에 걸려 죽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다. 일이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지키려는 안전선은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다. 프랑스에 입양된 한국인이 조니 워커 화이트 라벨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만 가지고 비행기를 탄다. 그곳에서 그는 한국인 입양인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품을 정리해 가까운 사람에게 주도록 처리해 놓았다.

소설은 제목대로 흘러간다. '우연의 신'이 장난을 친다. 일은 누군가들의 실수와 착오로 어그러진다. 조니 워커 화이트 라벨은 원래의 주인이 아닌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간다. 그는 그 일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야 할 의무가 있지만 그냥 내버려 둔다. 조니 워커 화이트 라벨의 운명을 제멋대로 상상하면서.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잃어버린 걸 찾겠다고? 삶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아. 그냥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못했을 뿐이야. 주어지지 않은 거지. 세상에 그는 그 순간 자신이 다름 아닌 바로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고 나니까, 그의 머릿속에 그녀의 호텔 객실에 남아 있을 화이트 라벨이 떠올랐다.

(손보미, 우연의 신에서)

무언갈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미래를 걱정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겁을 먹고 방어선을 친다. 건강 염려증에 걸리고 아파트 시세를 알아보고 통장 잔고를 확인한다. 우연의 신에서 그리는 사건은 완벽한 서사를 맺지 못한다. 소설가 자신의 상상으로 결말을 매듭짓는다. 이야기는 인과, 개연성, 필연, 구성의 지배를 받지 못한다. 소설가라는 사람은 사건 하나를 놓아두고 '우연의 신'이 불러주는 대로 자판을 치고 또 칠 뿐이다. 소설가라도 이야기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

지금 괜찮으면 괜찮다. 커피 주문할 때 오백 원 비싸서 메뉴판 앞에서 고민했다. 이제는 바로 주문한다. 내일의 불행을 미리 끌어와 오늘의 식탁에 올려놓지 않는다. 먹고 쉬고 보는 것. 쉽고 단순한 유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우연의 신에게 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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