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는 나의 집
금희 지음 / 창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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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희의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을 읽어 가다 보면 만나는 풍경이 있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살아가는 현대판 유목민의 모습이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북한에서 중국으로. 한국에서 다시 중국으로. 금희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륙에서 대륙으로 신산한 삶의 사연을 가지고 떠난다.


그들이 떠나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을 가지기 위해. 서류와 형식뿐이지만 그네들은 이름 석 자를 집에 새기기 위해 기차를 비행기를 낡은 버스를 탄다.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버린 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며 우리는 그들에게 무람없이 편견을 내보인다. 조선족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실리는 적의와 호의를 이제는 단박에 구별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은 아련한 과거를 더듬는다.


소설은 우리가 살아온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제 소설가 금희는 조선족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경험으로 글을 썼다. 중국과 한국에서 겪었던 조선족으로서의 삶은 소설로 발화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 살아낸 것이 아니다. 사는 것이 소설이 되었다. 소설이 되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 한국에서 청소와 식당 보조 일을 했다. 다시 소설 쓰기로 돌아갔다. 명예와 부 따위는 없다. 그저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살아간다. 『세상에 없는 나의 집』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겪는 이야기를 엮어가다 보면 어느덧 작가 자신의 지난날을 그려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허구의 세계 속으로 밀어 넣는다 해도 서사는 완벽하게 소설가의 과거를 닮아 있다.


책의 처음에 실린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은 한국어과 강사로 일하는 '나'와 중국인 '닝'의 만남에서 출발한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닝'을 '나'는 부러워한다. '닝' 역시 남편과 공동 명의로 집을 가지게 된 '나'의 삶을 동경한다. 집 한 채를 마련하고도 '나'는 그곳을 어떻게 꾸며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주변인들의 삶에 물음표를 던진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알 수 없음과 알지 못함의 연속이다. 자신이 원하는 자리가 어디인지 모른 채 방황하는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중간 지대에서 헤매는 소수들의 고뇌를 밀도 있게 그린다. 조선말과 중국말을 전부 할 수 있다는 건 어느 세계에도 완전하게 속해 있지 않다는 절망을 소설은 이야기한다.


「봉인된 노래」에서 집안을 들어 먹는 외삼촌에 관한 회상은 우리 민족이 겪어왔던 좌절을 은유한다. 운이 좋지 않다고 자신의 어그러진 인생을 두둔하는 외삼촌의 변명을 들으며 '나'는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것을 느낀다. 남보다 못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외삼촌의 일생을 차갑게 보는 어린 화자는 곧 우리 자신이다. 금희의 문장은 촘촘하다. 생소한 한문이 섞여 있기도 해서 빠르게 읽어나갈 수는 없다.


한국어로 소설을 쓰는 동시에 중국어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중적인 세계에서 소설가 금희는 문장에 자유를 주는 대신 엄격함을 그대로 표현한다. 금희의 문장이 낯설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과거를 잠시 잊은 것이다. 가난과 상처를 대물림한 예전을 잊고자 노력한 결과가 될 것이다. 낯선 문장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과거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알지 못하는 것은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의 서사는 우리가 잊고자 했던 과거의 아픔을 그대로 가져온다. 그중에서 「옥화」는 우리를 과거의 상처로 데리고 간다. 북에서 왔다는 여자에게 돈을 꾸어주는 일로 인정을 베푸는 것의 허위를 소설은 낱낱이 밝힌다.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온정과 배려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교회에서 만난 여인은 홍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청하고 그것이 홍에게만 부탁한 일이 아님이 밝혀진다.


…"왜 내가 줘야 하지?" 홍이 묻자 "가졌으니까" 하고 여자가 대답했다. 홍은 자꾸 옥화로 변하려 하는 여자를 붙들고 물었다. "그래서 줬잖아, 근데도 뭐가 불만이야?" 하면 여자는 매번 꿈속에서 볼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찢어져 올라간 눈으로 홍을 찌뿌둥하니 내려다보았다. "그 잘난 돈, 개도 안 먹는 돈, 그딴 거 쪼꼼 던재준 거 내 한나도 안 고맙다요."

'그딴 거'라니?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홍은 꿈속에서도 가슴이 답답하여 손으로 박박 내리쓸어보았다. "내도 한국 가서 돈 많이 벌어바라, 내는 너들처럼 안 기래." 홍의 몰골을 보고 피식 웃던 여자는 급기야 킬킬대며 배를 부여잡고 웃어대다가 옥화로 변하고 말았다.

(금희, 「옥화」中에서)


금희가 그리는 소설의 인물들은 남녀 구별 없이 떠돌아다닌다. 집이 있음에도 집이 없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고향이 아닌 새로운 어딘가를 꿈꾸며 떠나는 그들은 유랑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든다. 그러나 집을 찾아 떠나는 그들은 좌절하고 만다. 떠나온 그곳과 이곳이 다르지 않음을 잔인하게 깨닫는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주민의 얼굴을 하고서 그들은 다시 떠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홍은 떠나는 여자에게 돈을 빌려주며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홍은 여자를 오해했고 여자 역시 홍의 진심을 오해했다. 오해만을 남겨둔 채 사람들은 이별한다. 하느님만 아시는 믿음은 배반당한다.


결코 대물림하지 않아야할 부와 가난이 대물림되는 사회. 이곳과 그곳은 다르지 않다. 격동하는 중국과 한국 사회에서 발붙이고 살아가기는 녹록지 않다.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벌이는 사업을 위해 돈을 빌리러 떠나는 여정을 그린 「월광무」에서 우리는 지친 아버지의 얼굴을 만난다. "아빠, 어디야?"라고 물어오는 아들의 연락을 받으며 기차와 차량을 갈아타는 유의 시간은 빛이 나다가도 이내 꺼져 버린다. 희망이란 그렇다. 아슴푸레 빛나다가도 사라져 버린다. 달빛 아래 별과 반딧불이가 겨우 반짝이고 있지만 한 걸음 나아갈 수조차 없는 희미한 밝기를 가지고 있다.


소설은 미약한 빛을 쏘아 올린다. 차별과 멸시가 당연시되는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소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설가 금희는 이방인의 얼굴로 한국에서 살았다. 소설이 되지 못한 시간을 견디며 자신이 쓰고 싶은 문장을 하늘 위로 쏘아 올렸다. 소설은 힘이 되지 못한다. 세상을 바꿀 수도 없다. 당신의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었을까. 나약한 힘마저 없었기에 소설을 썼다.


친동생에게 맡겨 놓은 아들. 그 아들이 다니는 학교로부터 연락이 와 힘들게 찾아가는 소설 「쓰레기통 위의 쥐」의 시간은 낯설지 않다. 우리가 그랬다.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눈칫밥을 먹여가며 남의 집에 맡겨 놓았었다. 분명한 차별을 견뎠고 적의를 감당해야 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과 아버지가 목격한 쥐는 허상이 아니었다. 어떡하든 발버둥 치며 살아가려는 몸부림을 한 자신들이었다.


"허 참, 사람 사는 거 보면……그러네요. 우리는 좀 더 잘 살아보자고 그쪽 나라로 떠나가고, 그쪽은 더 잘 살아보자고 이쪽 나라로 떠나오고……" 박철이도 젓가락을 놓고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흣……" 박철이의 심각한 표정에 여자는 처음으로 피식 엷은 웃음 같은 것을 지어 보였다.

"그래요. 그렇게 따지고 보니까 결국 우리는 다 같은 노마드일 뿐이네요."

(금희, 「노마드」中에서)


국경이 무너지고 있다. 국경은 이제 의미가 없다. 산과 강을 경계로 한 지리적인 경계만이 있을 뿐이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삶에서 '집' 한 채를 가지겠다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 몽골인들은 현명하다. 가축을 데리고 풀을 찾아 이동하는 자유로운 삶. 생존의 문제로 떠돌아다니는 것이라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간절히 원하던 자유의 이념이 존재한다.


집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자유를 포기한다. 「노마드」의 박철이는 한국에서 만난 두 여자를 잊지 못한다. 수미와 선아. 그녀들은 자유를 찾아 한국에 왔지만 돈이라는 불의 앞에서 자유를 포기한다. 중국으로 돌아가 아파트와 가게 하나를 살 수 있는 돈을 번 박철이는 안주할 기회를 엿보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변화의 바람이 거센 그곳에서 발붙이고 살 수 있는 여유로움은 사라진지 오래이다.


호적을 옮기는 사무소에서 만난 옛 친구를 아는 척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돌도끼」에서 화자는 사라져간 추억의 흔적을 찾고자 한다. 유년의 기억을 놓아두고 도시로 이주하는 청춘의 얼굴은 늙어갈 채비를 하고 있다. 거창하게 금희의 소설 속 인물들을 유목민이라고 썼지만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뿐이다. 자유, 정의, 풍요라는 허황된 상징으로 그들을 품으려고 했다. 그들은 가난으로 점철된 과거와 현재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슬픔이다.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의 주인공 '나'는 두 개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두 개의 언어로 살아간다는 것은 제대로 된 하나의 세계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나'가 겨우 가질 수 있는 것은 집 한 채. 금희는 집을 가진 이도 가지지 못한 이도 결핍의 시간을 살고 있음을 인물을 통해 형상화한다. 세상에 없다, 나의 집이란. 존재한다고 믿는 믿음만이 겨우 있다. '나'가 집을 사고도 그 안을 꾸밀 기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은 소유의 개념조차 확고히 가지지 못하고 살았음을 의미한다.


반도라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도 국경 밖을 탈출할 수 없는 우리들. 소설은 국경 밖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조선이라는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나라의 이름을 여전히 가지고 살아가는 민족이 있다.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잊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잊히고 사라진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기 있다고 말하는 소설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은 꼭 읽혀야 한다. 다른 삶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부모와 형제와 이웃의 이야기로 현재의 시간으로 불려왔다.


소설가 금희는 소설의 인물들에게 꼭꼭 이름을 지어주고 호명한다. 익명이 아닌 이름과 출생 연도가 있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무대에 올린다. 경계선에서 서로를 경계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소설은 내일이라는 미래를 열어준다. 그들이 허물어야 할 벽에서 희미한 빛이 되어주는 금희 작가의 다음 소설을 기대한다. 우리는 서로를 부르기 위해 경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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