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소리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2
김기택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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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

-김기택


과녁에 박힌 화살이 꼬리를 흔들고 있다

찬 두부 속을 파고 들어가는 온몸을 흔들고 있다

여전히 멈추지 않은 속도로 나무판 두께를 밀고 있다

과녁을 뚫고 날아가려고 꼬리가 몸통을 밀고 있다

더 나아가지 않는 속도를 나무 속에 욱여 넣고 있다

긴 포물선의 길을 깜깜한 나무 속에 들이붓고 있다

속도는 흐르고 흘러 녹이 다 슬었는데

과녁판에는 아직도 화살이 퍼덕거려서

출렁이는 파문이 나이테를 밀려 퍼져나가고 있다


온 몸의 힘을 다해 날아가는 생의 몸부림. 버둥거리고 도망쳐봐도 결국에는 너에게로 날아가는 환상. 잘못 날아가 박히는 한이 있더라고 날아가고야 마는 그리움. 박혀서 뺄 수 없는 단단한 오해.



환풍기

-김기택



한숨에 환풍기가 달린다


아무 데나 들이받으며 나갈 곳을 찾던 바람이

피부를 뚫어 입 구멍을 내고 나와

벽에 환풍구를 뚫는다


환풍기에 빨려 들어가는 상체

버둥거리다가 풀썩 떨어지는 하체


방 안이 크게 부풀었다가 확 쪼그라든다

이음새 헐거운 바람이 덜덜거린다


어느 집인지 모르겠지만 화장실에서 노래를 부른다. 지독하게 못 부르는데 목청은 크다. 아침을 시작하기 위한 루틴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려 한다. 노래를 듣다가 다시 잠든다. 자장가. 어떤 이는 양치질을 할 때 칫솔을 목구멍까지 밀어 넣는지 토악질을 한다. 꾸에엑. 아침마다 돼지를 잡는다. 공동 주택의 안녕을 환풍기로 확인하는 시간. 다들 잘 지내세요.



기다리래*

-김기택



기다리래. 6835톤 배가 뒤집히는 동안, 뒤집힌 배가 선수 일부분만 남기고 가라앉는 동안, 기다리라는 방송만 되풀이하고 선장과 선원들이 빠져나가는 동안, 움직이면 위험하니까 꼼짝 말고


기다리래. 해경은 침몰하는 배 주위를 빙빙돌기만 하고 급히 구조하러 온 UDT와 민간 잠수사들을 막고 있지만, 텔레비전은 열심히 구조하고 있으니까 안심하고


기다리래. 오지 않는 구조대를 기다리다 지친 컴컴한 바닷물이 먼저 밀려 들어와서 울음과 비명을 틀어막고 발버둥을 옥죄어도, 벗겨지는 손톱과 부러지는 손가락들이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잡아당겨도, 질문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래. 바닷물이 카카오톡을 삼키고, 기다리래를 삼키고, 기다리래를 친 손가락을 삼켜도, 아직 사망이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래. 엄마 아빠가 발 동동 구르며 울부짖어도, 구조된 교감 선생님이 터지는 가슴에다 목을 매어도, 유언비어에 절대로 속지말고 안내 방송에만 귀 기울이며


기다리래. 죽음이 퉁퉁 불어 옷을 찢고 터져 나와도, 얼굴이 부풀어 흐물흐물해져도, 학생증엔 앳된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손아귀에 그 얼굴을 꼭 쥐고서


기다리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맹골수도 물 속에서 기다리래.


*"기다리래. 기다리라는 방송 뒤에 다른 안내 방송은 안 나와요." 세월호가 물 속에 가라앉은 지난 16일 오전 10시 17분, 세월호에서 단원고 학생의 마지막 카카오톡 메시지가 전송됐다. 오전 9시 30분 해경 구조정이 도착하고도 약 50분 뒤다.(「연합뉴스」 2014. 4028)


어떤 시간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슬픔이 된다. 눈물이 흐른다. 지나간 기억이라고 잊어버릴 수 없는 시간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다. 자유로울 수 없어서 시를 쓰고 시를 읽고 봄을 기억한다. 이제 봄이 올 건데. 비가 오고 눈이 와서 봄이 올거라고 하던데.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기다리래라는 말. 참담한 거짓말. 가혹한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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