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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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아쓰코의 에세이 『밀라노, 안개의 풍경』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아스라한 풍경의 자리를 더듬어 간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얼마 후 그녀는 닛폰유센의 화객선을 타고 제노바에 도착한다. 승객이 고작 네 명이었다. 배가 정박할 때쯤 폭풍우가 몰아쳤다. 하선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했다. 조금 있자 하늘이 맑게 개었다. 비에 씻긴 거리를 걸으며 처음 만난 유럽의 신기한 얼굴을 마주했다. 가을에서 겨울, 파리 대학에서 강의를 듣기 위해 프랑스어 말고도 두 개 이상의 언어를 공부해야 했다. 말이 통하지 않은 동양에서 온 작은 여인은 문학에 몸을 맡기기로 한다. 8월 10일이라는 날짜에 의미를 부여하곤 하는데 그날은 스가 아쓰코가 이탈리아에 첫 발을 디딘 날이었다.

『밀라노, 안개의 풍경』은 그녀가 밀라노에서 만난 안개의 추억으로 시작한다. 추억은 힘이 세다고 했던가. 이 책을 관통하는 정조는 그리움과 추억이다. 문학을 공부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이별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한 어조로 술회하는 『밀라노, 안개의 풍경』에서 나는 슬픔을 마주한다. 슬퍼서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이십 대 후반에서 마흔까지의 시간을 그녀는 이탈리아라는 타국에서 살았다. 이방인의 얼굴로. 낯설어서 이제는 낯선 느낌까지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시절을 상상한다. 문학이 없었더라면 견디지 못했을 시간들이었다. 낯선 언어를 공부하고 친구가 보내온 흘려쓴 글자로 쓴 편지를 읽지 못해 남편에게 읽어달라고 했던 빈곤의 시간들.

무스타키 대신 레너드 코언을 건네주던 가티, 남편을 잃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던 나에게 수면제를 먹을 게 아니라 상실의 시간을 인간답고 성실하게 슬퍼하며 살아야 한다고 엄하게 꾸짖던 가티는 이제 거기 없었다. 그의 한없는 밝음에, 더는 나를 짜증 나게 하지 않는 가티의 모습에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스가 아쓰코, 『밀라노, 안개의 풍경』中에서)

문학이 없었더라면 견디지 못했을 시간들이라고 짐작하여 썼지만 스가 아쓰코의 젊은 날을 지탱해 준 건 사람들이었다. 낯선 이방인을 환대하기도 때론 마음을 나눠주기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전쟁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가 있었다. 번역 일을 맡기면서 단순히 일로 만난 사람으로 대하지도 않던 사람이 있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고 여행지에 함께 데려가 있는 힘껏 풍경을 마주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아끼지 않던 누군가들. 『밀라노, 안개의 풍경』에 실린 추억의 이야기 열두 편은 사람을 향한 연정의 기록이다. 삶이 힘들었던 건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지나온 시간을 앞에 두고 돌이켜 봤을 때 어떤 이의 마음속에는 애타는 그리움이 차오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두고 먼저 먼 곳으로 떠나갔다.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나와야 할까.

스가 아쓰코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남겨진 자로 타국에서 슬픔의 견뎌야 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그녀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이탈리아에서 겪었던 일을 글로 쓰기 시작한다. 버겁던 아픔이 문장으로 쓰이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녀는 기꺼이 자리를 내어준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잊혔지만 도시의 안개와 무심함을 가장한 풍경이 떠오른다. 상실을 겪어 낸 이가 불러오는 과거는 상실을 겪어야 할 이의 현재에 도착한다. 모두 슬퍼서 아무도 슬프지 않은 내일에 바쳐진다.

사바는 시에 관한 한은 '빵이나 포도주처럼' 진지하며 본질적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희구 혹은 결의를 지병처럼 짊어진 채 평생 고수해온 시인이다. 여기서 '시에 관한 한은'이라는 부분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사바에게 그것은 윤리나 인생을 논하며 다진 결의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시'에 대한 결의였다고 나는 해석한다.
(스가 아쓰코, 『밀라노, 안개의 풍경』中에서)

그리고 시가 있었다. 그리운 모국의 언어가 아닌 이방의 언어로 읽어야 했던 시가. 사랑하는 이와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서로에게 들려주던 밤이 있었다. 삶의 순간에 필요한 결의를 시에서 찾아야 했던 순간을 잊지 않았다. 모든 밤의 슬픔이 내게로 찾아올 때 읽어야 했던 시를 떠올린다. 『밀라노, 안개의 풍경』에 추억하는 그리움의 순간에는 사람과 시와 풍경이 존재한다. 누구를 떠올리고 누구를 떠올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때를 살았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삶으로부터 단 한순간도 도망치지 못했다. 아니 도망쳐 왔다고 생각했지만 늘 그 자리였다. 같은 곳에서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비탄에 빠져있었다. 내내 아프고 여전히 비겁했다.

책에도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스가 아쓰코의 전집은 여덟 권이다. 그중에 세 권이 국내에 번역되었다. 『밀라노, 안개의 풍경』을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던 이유에 대해 짐작하기 위해 서둘러 나머지 두 권의 에세이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베네치아의 종소리』를 챙겨 넣는다. 자신이 겪은 불행을 비감의 문장이 아닌 환희의 시간으로 돌려놓을 줄 아는 스가 아쓰코의 글에 존경을 표한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보낸 그 시간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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