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안녕하시다 1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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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일의 파락호로 불리는 성형은 1648년 무자생 쥐띠이다. 두역(천연두, 마마)을 앓은 세 살부터 여덟 살까지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 아비는 북벌에 뜻을 두어 임경업 장군을 따라 길을 나섰지만 소식을 알지 못한지 오래이다. 성형은 할머니가 운영하는 기생방에 들어앉아 세월아 네월아 지내며 스승이라 불리는 미수 영감의 심부름이나 다닌다. 우암 송시열이 어떠한지 보고 오라는 미수의 명으로 길을 나서다 훗날 숙종이 될 소년 이순을 만난다. 그때부터 성형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다.


성석제의 장편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는 헌책방에서 『국역 연려실기술 전집』을 만난 것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십만 원을 부른 주인에게 오만 원에 하자며 결국엔 칠만 원에 전집을 사서 한동안 잊어버렸다. 이사를 하며 펼쳐본 전집에서 발견한 한 권의 복사본에서 ‘소설’은 발견된다. 누군가들에게 의해 쓰이고 붙이고 잘라졌을 ‘소설’은 시대가 흐르고 흘러 헌책방에서 먼지를 먹고 있었다.


소설. 小說. 작아서 가벼운 이야기. 황당하고 우습고 처절한 이야기는 밤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것으로 여인들이 둘러앉아 심심 파적 읽는 것으로 돈이 조금 있으면 전기수에게 쥐여주고 한시름 세상을 잊어보려 하는 것으로 소설은 그 이름값을 했다. 우는 아이 울음을 그치게 할 요량으로 할미가 제 손자에게 호랑이보다 무서운 건 곶감이라고 할 때부터 소설은 작지만 큰 세계의 일을 그리는 훗날을 도모하는 이들의 슬픔을 그려 주었다.


『왕은 안녕하시다』는 진짜와 가짜가 어우러지는 세계 속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간다. 헌책방에서 발견한 전집 안에 숨겨져 있던 이야기 속 주인공 이순과 성형이 그리는 꿈으로. 송시열 선생의 집에 갔다가 개 취급을 받으며 개 짖는 소리를 내고 개똥을 먹으며 창피를 당하고 있을 때 성형을 구해준 건 어린아이, 꼬마였다. 호형호제를 하자며 먼저 수작을 부리며 성형에게 친한 척 구는 꼬마가 조선의 19대 임금인 숙종이 될 줄 누가 알았던가. 성형은 그저 미색이 뛰어난 아이와 연을 맺으며 기생방에 앉아 음주와 가무를 즐길 요량이었다.


현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13세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성형은 꼬마가 왕이 되고도 연을 끊지 않고 왕이 부르는 대로 달려가 어린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다. 『왕은 안녕하시다』의 이야기는 폐위되었던 인형왕후가 궁궐로 돌아오면서 끝이 난다. 그 사이에 서인과 남인의 대립으로 인한 당파 싸움과 가뭄과 기근으로 인해 처참한 백성의 고단한 삶을 그린다. 북벌에 실패해 청에서 요구하는 대로 갖은 공물을 바치고 대국으로 떠받들어야 하는 조선의 비애를 다룬다.


아니, 나처럼 덜떨어진 인간이 뭐라고 임금의 지척에서 무슨 일을 하라는 거야. 뭘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정말 왕의 곁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였다. 또 꼬마가 내게 먼저 형제가 되자고 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래, 내게 나도 잘 모르는 어떤 능력이 있어서 왕을 도울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형제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내 아우가 그걸 원한다면.

(성석제, 『왕은 안녕하시다』中에서)


조선 건국 때 온건 개혁파로 분류되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한 사림은 성종 때에 중앙 정치에 등장했다. 그 후 훈구파와 대립해 사화를 입고 다시 지방으로 내려간 그들은 선조 시기 중앙으로 복귀해 권력을 차지했다. 사림 은 지역과 학문의 경향에 따라 여러 붕당으로 갈라졌다.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이 죽자 그의 어머니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할지를 두고 치른 예송 논쟁으로 서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현종이 왕에 오른 후 효종의 왕비 인선 왕후가 죽고 시어머니 조대비가 상복을 입을 기간을 두고 또 논쟁이 펼쳐졌고 1년 복을 입을 것을 주장한 남인이 승리해 실권을 잡았다. 예법을 따지는 논쟁이었지만 그 안에는 서인과 남인의 첨예한 정권 장악의 욕심이 숨어 있는 사건이었다.


숙종 이순이 왕으로 집권하던 시기에는 예송 논쟁과 서인과 남인으로 갈라진 정치 세력의 다툼이 극심하던 때였다. 꼬마 이순은 성형에게 자신의 곁을 지켜달라고 말했다. 성형은 곁에 아무도 둘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이순을 위하여 기꺼이 날라리 형님이 되기로 한다. 처음에는 별좌라는 직함을 얻고 이후에는 왕실의 재정 관리를 맡는 내수사에 그밖에 왕이 가라고 한자리에 가서 자신도 몰랐던 신통방통한 재능을 펼친다. 그중 최고는 멍텅구리라는 검을 얻어 조선 제일의 무술 신공을 발휘하며 어쩌다 무사가 되기도 한다. 대비 마마전에 있는 나인 옥정을 발견해 연심을 품기도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옥정은 이순의 품에 안겨 정치적인 격랑으로 빨려 들어간다.


어린 왕은 노회한 신하들 곁에서 갈피를 못 잡다가 나이를 먹으며 성장해 간다. 서인과 남인, 후에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당쟁 속에서 강력한 왕권을 이룩하려 정권을 교체하는 환국의 파도 위에 올라타는 수고를 감행했다. 『왕은 안녕하시다』는 허구의 인물인 성형의 눈을 통해 이순이 왕으로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촘촘한 언어로 그리고 있다. 왕의 곁에서 왕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은 환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켜질 듯 깨어질 듯한다. 급작스러운 정치적인 변화 속에서 성형이 모시는 스승들이 귀양을 가거나 죽어 나가기 때문이다.


왕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건 여전히 신하들이었다. 신하들이 귀양 간 송시열처럼 왕을 우습게 알거나 삼복처럼 왕의 여자를 넘보아서가 아니었다. 신하라는 것들이 한결같이 무능하여 국사를 제대로 처결하지 못하는 것, 신하들끼리 이전투구와 세력 다툼으로 날을 새느라 민생과 왕토가 피폐해지는 것, 도성과 지방의 신하와 수령들이 가렴주구로 백성을 등쳐먹어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나라를 저버리거나 역질과 굶주림으로 저세상으로 가버리는 것, 부패한 신하들 때문에 살림이 거덜 난 나라에 외척이 쳐들어 오는 것이 왕위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였다.

(성석제, 『왕은 안녕하시다』中에서)


왜 하필 숙종 때의 일을 성석제는 소설로 불러온 건가. 가만히 생각해 본다. 치열한 예송 논쟁과 환국의 중심에 있던 왕이었다, 숙종은. 희빈 장 씨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신하들의 힘에 좌지우지되어 정권을 손바닥 뒤집듯 교체한 여자 치마폭에 쌓인 줏대가 없는 왕으로 그려졌다, 이순은. 소설은 이름 그대로 작은 이야기를 펼쳐 놓는 역할을 한다. 역사가 증명하지 못한 사관이 미처 적지 못한 세세한 장면의 틈으로 소설은 비집고 들어간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왕을 이름난 정승집 개보다 못하게 여기는 신하들의 아귀다툼에서 살아남으려는 왕이었음을 소설에서나마 보여주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해 본다.


그 곁에 신분은 낮지만 머리는 좋지 않지만 입만은 자유자재로 놀리고 후에는 아버지가 물려준 비기로 무공을 연마한 성형이라는 인물을 두어 혼란한 조선의 역사를 바로잡고자 한 한 인간의 노력과 꿈을 그리고 싶어 했음을 상상해 본다. 상복을 몇 년 입을 것인가, 왕자를 원자를 삼을 것인가는 백성들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왕은 안녕하시다』에서 줄곧 성형은 백성들의 고단하고 피폐한 삶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가뭄과 흉년, 역병으로 이어지는 흉난에 백성들은 굶어 죽는다. 대동법을 시행했지만 간악한 관리들의 등쌀에 스스로 도적이 되기도 하는 등 백성들의 삶은 편치 못했다. 『왕은 안녕하시다』는 왕은 안녕하시다고 말하는 이에게 왕은 안녕하신가라고 반문하고 그런데 우리는 안녕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소설이다. 성형은 신분과 지위의 고하를 따지지 않는 김만중을 만나 이야기책을 받아든다.


“내가 그 이야기를 두고두고 볼 수 있게 자네가 직접 글을 써보는 게 어떻겠나?”

“불학무식한 제가 문자와 문장과는 담을 쌓았으니 쓸 수가 없지요.”

“문자와 문장? 세종 임금께서 만들어주신 글로 쓰면 되지 않나? 초동목부며 규방의 여인들로 모두 아는 걸 자네 또한 알고는 있겠지?”

“그것도 글재주가 있어야 쓰는 게 아닙니까?”

“진실함과 굳센 믿음이 있으면 누구나 쓸 수 있고 오래도록 전해지며 천년만년 사람들을 끄는 향을 풍기는 게 패설이라네.”

……겉장에 ‘구운몽’이라는 제목이 날아갈 듯 힘찬 서체로 쓰여 있었다.

“이건 한글로 되어 있어서 저도 읽을 수가 있겠네요.”

“조선 사람이 조선의 글자로 된 것을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네가 돌아가는 길에 이걸 읽고 내 어머니처럼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여인들에게 읽게 해주면 고맙겠네.”

(성석제, 『왕은 안녕하시다』中에서)


흔하게는 잡소리, 허구가 가미된 우스갯소리, 농담으로 심심풀이용으로 지어진 이야기, 소설은 태어나는 순간 신분이 정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의 귀한 위로가 되어 불리고 쓰였다. 말과 언어가 일치하지 않아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던 시대에 구비로 전해진 이야기는 훗날 사대부들에 의해 지어진다. 성형은 김만중의 뜻인지 자신의 깨달음인지 모를 힘으로 책 한 권을 남긴다. 꼬마 임금 이순과 파락호 성형의 이야기는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도 책이라면 환장하는 어느 사람의 손에 의해 미래의 독자의 손에 쥐어질 날을 위해 잠자코 먼지를 양식으로 먹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왕은 안녕하시다』는 왕과 백성들이 공평과 사랑을 말하며 살아가는 시대를 꿈꾸며 안녕을 이야기한다. 힘이 없는 왕은 왕이어도 안녕하지 못하고 그런 왕을 위해 살아가는 백성의 삶 역시 편하지 못하다. 그들이 상상할 수 없던 2019년이라는 미래를 갖지 못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착한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는 이야기와 이야기를 쓰는 인간의 믿음에 대해 전한다. 살아남으라는 성형의 마지막을 되새긴다. 살아남아 누구에게 뭔가를 남기는 자가 되어 혹독한 시절을 견뎌야 함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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