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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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하다. 안타깝게 뉘우쳐져 마음이 조금 언짢고 아프다,라는 뜻으로 국어사전에 실려 있다. 요즘 그렇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차마 위로할 수 없는 내 마음이 속상할 그이들의 사정이 짠하다. 서로가 서로를 짠하게 여기는 마음만 있어도 된다고 넘겨보지만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노래 가사가 의미심장하게 와닿는다. 내가 웃으면 누군가는 울면서 잠들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오롯이 나의 행복만을 바랄 때가 있었다. 나만 잘 살면 되는 거지 하면서 살아가는 날이. 여전히 키는 작지만 다른 이의 슬픔을 넘겨다볼 정도의 눈높이를 가지게 될 수 있는 건 소설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며 살아가는 시간이 있어서 누군가의 슬픔에 귀를 기울이고 좋은 일에는 함께 웃어줄 수도 있게 되었다. 생전에 그이를 두 번 뵈었다. 봄과 겨울. 소녀처럼 가녀린 음성에 맑게 웃으시던 박완서 선생을 만난 스무 살을 기억하고 있다. 꽃이 피었다가 지고 날이 추웠다가 따뜻해지는 몇 번의 계절을 건너 어느덧 선생이 아름다운 별들의 나라로 가신지 8년이 되었다. 선생의 빈자리를 추억하는 소설집 『멜랑콜리 해피엔딩』을 읽으며 내가 가진 꿈의 크기를 재어 보았다. 꿈은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하면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다행히 나는 꿈을 잃지 않았고 『멜랑콜리 해피엔딩』에 소설을 실은 작가들 역시 꿈을 간직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었다.


소설을 좋아하지만 문학을 사랑하지만 힘에 부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 소설가 박완서의 글을 읽으면 삶의 순간이 명징 해진다. 도덕과 부도덕을 시원하게 넘나들고 욕심과 욕망의 줄타기를 능수능란하게 하는 선생의 글을 읽으며 나만 치사한 건 아니구나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멜랑콜리 해피엔딩』에 실린 스물아홉 편의 소설은 그런 선생의 문학의 자리를 추억한다. 시대가 달라졌어도 소설가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란 같은 지점을 선회한다. 한유주의 소설 <집의 조건>에서 만난 존대와 하대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중개인의 모습에서 얼마 전에 겪은 나의 경험이 떠오르고 술김에 충동적으로 산 아들의 레고 장난감을 환불하러 가는 이기호의 <다시 봄>에서 짠하고 짠한 부자의 봄길을 상상한다.


떠올림과 상상의 힘으로 『멜랑콜리 해피엔딩』을 읽어나간다. 그이를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어도 괜찮다. 선생을 뒷모습만을 만난 추억을 쓴 정세랑의 <아라의 소설>에서 진실한 이야기의 힘을 만난다. 소설이지만 나는 정세랑의 힘 있는 다짐을 그 안에서 읽어낸다.


그래도 고개를 들어 멀리 보면, 박완서 선생님이 계시는 듯했다. 세상을 뜨고 나서도 그렇게 생생한, 계속 읽히는 작가가 있다는 게 좋은 가늠이 되었다. 사실 아라가 생전에 작가를 뵌 건 아주 잠깐, 아주 멀리서였고 그것도 뒷모습이었다. 그때 아라는 대작가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카락을 가지도 싶다고 기이한 생각을 했다……. 한 올만 뽑으면 안 될까 하고 록스타에게 손을 뻗는 팬처럼 침을 꿀꺽했지만 물론 그런 망나니짓은 하지 않았다. 용기 내 앞에서 인사라도 할걸, 뒤늦은 후회를 하다가 따라 걷는 자에겐 뒷모습이 상징적일 수도 있겠다고 여기게 된 건 요즘의 일이었다.

(정세랑, <아라의 소설>中에서)


장르 문학이라고 규정되어 버린 자신이 쓰는 소설을 대놓고 무시하는 선배의 말에 기분이 상한 아라는 생전에 SF 작가에게 빛나는 평가를 내린 박완서 선생님을 그리워한다. 이 마음은 서술자 아라를 넘어 소설가 정세랑의 것이리라 감히 추측해본다. 소설가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다정하고 환한 글이 남아 후배 작가들의 등을 토닥여준다. 소설가 박완서의 글은 토닥임으로 작가들을 책상으로 인도해 준다. 그이가 남긴 소설의 어떤 시간들을 불러와 자신만의 이야기로 그리움을 적어간 소설집 『멜랑콜리 해피엔딩』은 사랑이다.


아직, 이곳에, 사랑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 윤이형의 <여성의 신비>에서 만난 지혜와 슬기는 나의 미래이거나 현재이며 <언제나 해피엔딩>에서 백수린은 우리 삶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라고 넌지시 말함으로써 별도 없는 한 밤을 살아가는 우리를 달래준다. 짠하고 고독한데 우습고 분주하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우리를 짠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오늘을 버틴다. 다시 겨울이고 이내 봄이 올 것이다. 선생이 떠난 자리에 풀이 돋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낸 『멜랑콜리 해피엔딩』을 놓아둔다. 책장을 덮고 나면 기억에서 사라질 이야기를 쓰는 우리가 있음에 선생은 흐뭇한 얼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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