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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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박준


그곳의 아이들은 

한 번 울기 시작하면


제 몸통보다 더 큰 

울음을 낸다고 했습니다


사내들은 

아침부터 취해 있고


평상과 학교와 

공장과 광장에도

빛이 내려 


이어진 길마다 

검다고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엽서를 모으던 때가 있었다 한 장에 백 원 천 원을 들고 열 장을 사서 돌아나오는 길에는 세상의 모든 그리움의 말을 적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펜을 들고 이름을 쓰려다 망설이다 엽서를 책 속에 끼어 놓았다 아무말이나 적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때 적지 못한 말은 지금의 슬픔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다짐은 우리는 혼자일 것이라는 예언이다



낮과 밤

-박준


강변의 새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떠나는 일이었다


낮에 궁금해한 일들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답으로 돌아왔다


동네 공터에도 

늦은 눈이 내린다


한숨 자야 하루를 보냈다는 실감인 날이었다 오전에 일을 잊기위해서라도 낮에서 밤으로 바뀐 걸 보고야 잠이 드는 시간 흐린 하늘을 날아 새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눈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새들이 날아간 그곳에는 낮과 밤이 존재할까 모든 의문을 묻은 채 잠이 든다



입춘 일기

-박준


비가 더 쏟기 전에 약국에 다녀왔습니다 큰 길에는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제 시내는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凄然이 가까워졌다면 기억은 멀어졌다"라는 메모를 해두었습니다 비를 맞듯, 달갑거나 반가울 것 하나 없이 새달을 맞고 있었습니다


거리에는 불빛보다 사람보다 문 닫은 상점이 더 많았습니다 임대와 폐업을 알리는 현수막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습니다 1월을 걸어 2월 지나 3월에는 봄을 만날 것이라 예감합니다 봄이 먼저 와 있을 것이라는 편지가 도착하기 전까지 달려가겠습니다 아득한 오늘에서 선명한 내일의 일로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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