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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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막연히 '너'라고 명명하는 것은 꼭 하나의 대상만이 아니다. '너'는 나일 수 있고 연인일 수도 있고 오지 않을 것 같은 소망일 수도 있고 풀리지 않는 물음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푸른 그늘을 걸으면서 우리는 '너'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찾을 수 있을지도. 그러나 '너'에게로 가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쉽지 않다. 마치 그베르더의 시처럼 말이다.

(허수경, 『너 없이 걸었다』中에서)


허수경의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를 읽는 시간은 내내 밤이었다. 쉽게 밝아오지 않는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시인과 함께 뮌스터 거리를 걸었다. 시 한 편에 산문 하나씩. 잠이 들었다가도 새벽 두시, 세시에 깼다. 왜 이럴까. 의문을 하기도 전에 이제는 세상에 없는 허수경의 손을 잡고 성당과 역사, 박물관을 순례했다. '너'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허수경은 한국에 두고 온 그리움을 절절하게 풀어 놓는다. 서울의 바쁜 일상과 고향 진주의 느린 저녁을 떠올린다. 시인은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뮌스터 거리를 걷고 또 걸었던 듯하다. '너 없이'.


시인이 아프다고 했다. 읽을 힘이 남아 있을까. 병을 겪으면서도 문장을 읽고 또 읽었을 시인. 아낀 힘으로 시어 하나를 떠올렸을 시인. 살아있다는 착각에 빠진 우리는 그저 '이곳'에서 시인이 남긴 글을 읽는다. 다른 별로 시집과 그토록 사고 싶어 했던 화가의 화집을 들고 살러 들어간 뒤 아직 잘 있다는 소식이 없다. 별이 너무 작아 해가 뜨고 지는 풍경을 의자 위치를 바꾸어 가며 보기를 바랄 뿐이다. 뮌스터의 가을과 겨울 그리고 서울의 봄을 우리는 기억하겠다. 늘 생각하지만 애도는 힘이 든다. 떠난 그이의 빈자리를 어루만져도 빈자리는 실감 나지 않는다. 비어 있는데도 말이다.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아마도 손을 잡아주는 일이 아닐까. 손을 잡는 순간이 끝나면 그때야 오열이 터져 나온다.

(허수경, 『너 없이 걸었다』中에서)


손을 잡지 못하면 이별한 것이다. 언제든 잡을 수 있는 손이었는데. 마디가 툭툭 불거지고 주름이 자글자글 잡힌 손이었다. 한 번씩 쥐고 있으면 너무 작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 손. 그 손을 이제 잡을 수 없다. 죽음은 손을 잡지 못하는 것. 시인과 뮌스터 시내를 걷는 동안 사라져 간 손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거닐었는데 기억만 존재할 뿐, '여기'에는 아무도 없다.


운하 길을 걷다가 늦은 시간임에도 불이 켜진 도서관의 불빛을 볼 때마다 설레는 마음은 분명 돈과 명예로 가려는 마음은 아닐 것이다. 정신을 단련시키는 동안 통장은 비어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늘어간다. 문학이나 미학이나 철학을 공부랍시고 할 게 아니었다는 자괴감도 커져간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소리 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책들을 향한 열망을 버릴 수는 없다.

(허수경, 『너 없이 걸었다』中에서)


가난한 독일 유학생이었던 시인은 책 욕심만은 어쩌지를 못했다. 책을 사지는 못해도 자주 구경하러 가던 서점 주인과 친해졌다. 시인이 말하지 않아도 주인은 책을 추천해주었다. 시와 고고학. 사라져가는 것들을 향한 열망이 담긴 학문. 시인은 땅속에 묻힌 역사를 발굴해내듯 시를 썼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땅속에는 많은 것들이 묻혀 있었다. 그들의 한숨, 기쁨, 해지는 풍경, 저녁의 밥상, 아침의 반가움들. 새벽은 느리게 찾아왔다. 그리고 시인이 남긴 거리의 기록은 끝이 났다. 삶은 이어지고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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