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지 않겠다 창비청소년문학 15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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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이라 두 달 동안 끊었던 치킨을 먹기로 했다. 전화를 걸어서 또박또박 사는 곳을 말해주었다. 예전에 한 번 내 발음이 이상했는지 메뉴가 잘못 온 뒤로는 더욱더 발음에 신경을 쓴다. 냉장고 야채실에 있는 양배추를 꺼냈다. 양배추 전용 채칼에 대고 양배추를 문질렀다. 쓱싹쓱싹. 잘 벼려진 칼날에 양배추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다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나의 엄지손가락의 살점도 잘려나갔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쓰악싹. 악!! 피가 멈추질 않았고 나는 휴지를 뭉쳐 엄지손가락을 잡고 그대로 따봉의 자세로 멈춰 있었다. 버퍼링이 심해 재생이 멈춘 영상처럼 일시정지된 상태로.


예전에도 한 번 커터 칼에 손을 베인 적이 있었다. 응급실에 가서 일곱 바늘 꿰맸다. 피만 보면 헛구역질이 나오고 어지럽다. 집 앞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오래 기다려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살점이 잘려 나간 것일 뿐이니 일주일 뒤면 낫는다고 했다. 능숙하게 소독을 하고 거즈를 붙여 주었다. 약국에 가서 거즈와 빨간약, 반창고를 사고 진통제를 받아왔다. 집안일도 해야 하니 손가락에 끼는 골무를 꼭 사라고 의사가 말해서 그것도 샀다. 집에는 시켜 놓은 치킨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식어도 치킨은 치킨이다. 따봉을 하면서 먹으니 더 맛있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약국을 나서고 집으로 오는데 전화를 받았다.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 전화였다. 이상하게도 엄지손가락의 살점과 전화를 맞바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살점을 내어 주고 전화를 받았다는 2018년의 마지막 하루의 이야기.


2019년 1월 1일이 되자마자 고른 책은 그런 의미에서 공선옥의 『나는 죽지 않겠다』로 정해서 읽었다. 살점이 뜯어져 나가도 자다가 가려워 얼굴을 긁어 붉은 인간이 되어도 나는 죽지 않겠다는 뜻으로. 청소년 소설이지만 『나는 죽지 않겠다』는 우리 사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반장이 학급비를 걷어 '나'에게 맡겨 놓았다. 그 돈의 일부를 요구르트 배달하는 엄마의 가방에 몰래 넣어 엄마를 웃게 하고 싶어 한 '나'의 이야기를 다룬 「나는 죽지 않겠다」를 시작으로 타인의 외로움에 기대어 울 때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이야기 「일가」로 넘어가는 동안 공선옥의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구마 이천 원어치를 사서 돌아가 엄마와 오빠의 허기를 배를 채워 주려는 아이. 좋아하는 아이에게 고백하고 싶어 아버지의 말을 듣고 편지를 쓰는 아이.


헤어지고 싶지 않아 편의점 알바를 해서 여자친구의 생일날 코트를 사주고 싶어 하는 아이. 학생의 신분으로 사회에 나와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직접 체험해 보고서야 부모님을 이해하는 아이. 엄마 시러라고 엄마 화장대에 적어 놨지만 결국 사랑하는 이는 엄마였음을 깨닫는 아이. 다정한 가족의 품이 그립고 세상에는 아리송한 것들에게는 의문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을 이른 나이에 깨닫는 아이. 『나는 죽지 않겠다』의 뒤에 실린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어린 시절을 통과해 오는 동안 그때의 감성으로 세상을 살아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공부만 열심히 하지 않았다. 공부만 하기에는 나를 이루는 주변이 복잡했다. 공부도 하면서 책도 읽고 공상도 많이 했다. 내가 가진 외로움의 크기를 재어보는 시간을 거쳐 다른 사람의 슬픔의 무게까지도 생각하려는 어른으로 자랐다.


그때 학교 가기 싫어 계속 나가지 않았더라면 책을 읽는 재미를 알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어 있었을까. 오랜만에 먹는 치킨 생각으로 오두방정을 떨며 양배추 칼에 손가락을 밀어 넣고 말았지만 허둥지둥 대고 엄살을 떨며 병원을 가고 우울한 심정이 되어 식은 치킨을 먹었지만 『나는 죽지 않겠다』를 읽으며 어린 시절의 나 같은 아이들을 만나며 짠해하는 나는 이제 어른이고 싶다. 공선옥은 가난을 그리는 작가다. 그는 과장하고 꾸미는 가난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 직접 경험하고 느껴본 가난의 모습은 나를 유년의 물기 어린 시간으로 데리고 간다. 명색이 데이트인데 라면집에 가서 라면 먹고 공원에 가서 캔커피를 마시면서도 멋있다고 말해주는 공선옥의 아이들이 있어 나는 죽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세상의 만병통치약은 빨간약이다. 한 병에 천 원인 그 약은 상처에 바르면 너무 빨개서 피인지 약인지 분간이 안되어 피가 멎었구나 안심할 수 있게 한다. 피가 계속 흘러도 약이구나 생각하고 낫겠구나 위로가 된다. 죽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빨간약을 사 놓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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