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매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8
김금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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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큰 결정을 내렸다. 결정하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결정을 하고 나서는 긴 시간 동안 후회와 불안, 두려움을 안고 지내야 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그때보다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다. 그러니까 김금희의 소설 『나의 사랑, 매기』를 읽고 나서는 만성적인 불안과 걱정을 조금은 떨쳐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유방암을 앓는 엄마를 돌보는 매기가 재훈에게 하는 이런 말 때문에.


"어머니 병세는 좀 어떠셔?"

내가 매기의 말을 기다리다가 안 되겠어서 먼저 물었다. 매기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냥 재훈아, 먹고 싶은 것 먹고, 보고 싶은 사람 보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고만 했다. 들어보면 환자를 돌보는 사람의 특별할 것 없는 대답이었는데 나는 아주 확실히 절망했다. 매기의 대답에는 말의 진기랄까, 온도랄까, 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中에서)


결혼한 매기와 어쩌다가 인연이 다시 닿아 만나는 재훈은 매기의 힘과 온도가 없는 말 때문에 절망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매기의 열기라고는 1도 느껴지지 않는 저 말에서 나는 하루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네 자리의 숫자 중 끝자리가 바뀌는 것으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내년이라는 시간 앞에서 조금은 당당해져도 될 것 같은 기분이 순식간에 든 것이다. 1월 1일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묻는 자리에서 나는 염세적인 성격을 숨기지도 않고 그 해가 그 해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라고 했다가 새해 일출을 보러 갈 것이라는 야심찬 계획을 하는 사람의 기를 죽이고 말았다. 그런 말을 잘도 내뱉고서 나는 다가오는 새해에는 희망이 가득 들어차고 소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질 것이라는 낙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금희의 소설 『나의 사랑, 매기』를 읽고서 말이다. 대학 때 어떤 신념에 휩싸여 플라토닉한 러브로만 일관한 재훈의 연애는 그가 입대하고 나서야 끝이 나고 말았다. 매기의 백 한번 째 편지의 이런 구절로 말이다. "잘 지내, 미래는 현재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긴 현재일 뿐이야." 재훈은 이게 이별의 말인지 미래를 함께 계획하자는 말인지 헛갈린다. 결국 전서구를 자청한 윤 병장이 가져다준 포스터에 매기가 쓴 문장으로 그 말은 단호한 이별의 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재훈은 오랜 밤을 의문과 불안으로 뒤척였다.



매기는 재연 드라마의 배우로 제주도에서 남편과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부주의한 성격의 친구를 둔 탓에 매기와 재회한 후 이상한 연애를 재훈은 하고 있다. 얼굴이 알려진 특성상 그리고 매기가 유부녀라는 사회적 제도의 특성상 그들은 레이디 치킨을 1층에 둔 집에서 만나거나 멀찌감치 떨어진 채 걷는 것이 데이트의 전부인 연애를 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온 현재든 현재로 이어진 미래든 그들에게는 현재라는 실감이 없는 상태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밤을 함께 보내고 맞이한 이른 아침의 끼니를 위해 찾아든 순대국밥집에서 유일하게 그들을 예쁘게 보아준 아줌마가 부르는 노래에서 그녀의 애칭을 따 매기라고 지은 시점에서 연애는 애초에도 그랬지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잘못된 길로 가는데도 그저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다.


김금희가 그리는 연애는 인물들의 대화나 행동에서 느껴지듯 열정이나 열기, 온기, 따뜻함 같은 발화점 이상의 온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낯설고 이상한 세계다. 그럼에도 그들의 아슬아슬한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는 없는 현재를 들여다보고 있는 나는 기이한 길의 삶의 방향을 지시받고 있다. 걱정은 단단히 붙들어 메고 파이팅 하자는 명랑만화의 주인공도 안 할 것 같은 대사를 나 스스로에게 하고 있다.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것 있으면 하고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보라는 『좋은 생각』의 글 속 마지막 문장의 말 같은 말에도 힘이 불끈 나는 괴이한 경험.


재훈의 목적 없고 미래는 전혀 보이지 않는 연애의 결말에서 삶의 무게란 야채를 고르고 그걸 들고 갈 수 있냐 없냐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선택한 야채니까 들고 가서 먹으면 된다. 누가 골라서 가방에 넣어준 것이 아니다. 무거워서 애초에 들고 가지 못할 것 같았으면 고르지 않아야 한다. 선택해서 넣었으니 들고 가야 한다. 재훈도 그렇고 매기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누가 선택해 준 것이 아닌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불안도 걱정도 두려움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고른 것이다.


나에게든 타인에게든 거절의 의사를 보이고 싶어 손목에 X자 문신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세상은 그렇게 거부의 의사를 명확히 밝혀야 진정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새해라고 별거 있겠냐라고 무신경하게 말해서 미안하다. 떠오르는 새해를 보고 이제는 달라지자 하는 마음의 정리 의식이 필요해서 그 일을 하겠다고 한 것일 텐데. 뻔뻔하게도 『나의 사랑, 매기』를 읽고 나는 내년에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걱정도 불안도 불만도 덜 한 사람으로 살 것이라고 다짐했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니 책에서 배우고 느끼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결국에는. '그의 사랑, 매기'는 잘 지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재훈도. 피해망상 쩌는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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