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여행 산문집
김연수 지음 / 컬처그라퍼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여수, 부산, 첸링, 몽골, 레소토,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밤베르크, 나가사키, 마드리드, 리스본…을 다녀왔다. 극세사 이불을 둘러쓰고 벽에 기대서 혹은 엎드려서, 누워서. 강추위가 몰려왔고 바람은 창문을 사납게 할퀴고 지나가는 동안 김연수의 여행 산문집 『언젠가, 아마도』를 읽었다. 읽었기 때문에 나는 그 많은 곳을 다녀왔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게으르고 소심한 데다 겁까지 많은 나는 정해진 장소 이외에는 다른 곳을 가는 걸 싫어한다. 내게 여행이란 상상만으로 피곤하고 괴로운 것으로 다가온다. 걷기 보다 앉아 있는 것을 떠나는 것보다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여행은 여행기를 읽으며 여행자가 간 장소를 눈으로 따라가는 것이다. 


  떠나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의외의 장소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는데. 지도를 사고 여행기를 모으고 제일 싼 항공권을 예약하고 도착할 도시의 명소를 찾아 루트를 정하는 일이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아니 귀찮은 일이다. 그저 내가 알거나 모르는 이들이 떠난 여행의 기록을 읽으며 이곳이 주는 안온함을 느끼는 것이 좋다. 김연수의 『언젠가, 아마도』는 일상 중독자인 나를 위한 맞춤 여행기이다. 그가 『론리 플래닛』에 꾸준히 연재한 글은 다시 하나로 모여 책이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이 꾸준한 작가는 책이 되기까지의 원고의 양을 계산하고 언제까지 쓰면 책이 될지를 예측한다. 책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외로운 행성을 부유하는 우리가 만나 인사하고 헤어지고 다시 내일을 기약하는 기록이다. 


  소설가 김연수는 여행자 김연수가 된다.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혼자 마시는 맥주와 호텔 커피숍에서 책을 읽는 시간은 소설이 산문이 되기도 한다. 사진가들과 떠난 여행에서 그 혼자 카메라 대신 수첩을 들고 풍경을 기록한다. 막상 소설을 쓰기 위해 여행을 떠났지만 글을 쓰지 못하는 날도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최적의 장소는 비행기의 이코노미석이라는 사실도 이 책을 읽고 알았다. 몽골의 게르에서 먹었던 낙타 고기는 오래 씹어야 비로소 고기 맛이 나며 부산의 택시 기사들은 말이 많다. 그들은 부산의 많은 맛집을 알고 있는데 그들만의 언어로 말해야 맛집 앞에 내려 준다. 여수 밤바다는 노래만큼이나 아름답다는 그런 이야기들. 


  여러 곳을 다니며 사진을 잔뜩 찍는 것보다 호텔에 누워 눈이 아플 때까지 인터넷 하기를 좋아하는 소설가. 기껏 일본에 갔는데 한국 음식만 먹고 돌아온 여행자. 우표 수집을 위해 비둘기호를 탄 기억을 좋아하는 소년. 호스텔에 혼자라는 실감보다 다른 투숙객이 있다는 사실로도 평온함을 느끼는 고독가. 김연수는 여행을 하는 동안 여러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된다. 『언젠가, 아마도』는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단 한 사람, 김연수의 다채로운 모습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나는 하얀 종이에 빽빽하게 쓰인 여행의 기록을 읽으며 러시아에 가게 되면 연필을 사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 여행지에서 전부를 살 수 없을 땐 연필을 사도 좋다는 소설가의 말을 꼭 듣겠다. 연필, 연필, 연필. 다른 것도 아닌 연필을 사서 모으는 소설가의 귀여움을 모른척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그 거리에서 건물 하나가 문구점인 나에게만 천국일 그곳에서 연필과 공책과 연필과 공책을 살 계획이다. 


  떠나지 않아도 좋다. 여행은 누군가 등 떠민다고 해서 떠나지는 게 아니다. 여기의 내가 다른 곳에 있을 나를 상상하며 시작하는 게 여행이다. 『언젠가, 아마도』 떠나겠지만 『언젠가, 아마도』 떠나지 않을 수도 있는 나는 여기에 앉아 한 권의 책을 읽으며 희망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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