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번째 파도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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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킬로미터에 가까운 해안선을 갖고 있는 소도시, 척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소설 『아홉번째 파도』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스릴러의 구조를 충실히 따라간다. 척주시 보건소 예방의약에서 약무직으로 일하는 송인화는 그동안 묻어온 과거의 사건 하나를 파헤쳐야 한다. 척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척주를 끔찍해한 송인화는 실패한 자의 얼굴로 척주로 돌아온다. 모든 걸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그녀 앞에 서상화가 나타난다. 보건소에서 가장 인기 많은 공익 근무 요원, 서상화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지난한 세월의 상처가 사라짐을 느낀다. 


  최은미의 첫 장편 『아홉번째 파도』는 계간 『문학동네』에 '척주'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소설은 강원도 삼척에서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한다. 인구 7만의 삼척에서 벌어진 일을 소설로 끌어와 현실성을 높였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불안감이 높아진 시점에 삼척에 핵발전소를 지으려는 당국과 저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허구라는 세계에서 긴장감이 극대화된다. 여기에 시멘트 광산에서 벌어지는 비극, 약왕성도회라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라는 재료가 더해지면서 소설은 독자들의 손에 퍼즐 조각 하나씩을 쥐여준다. 소설을 읽게 하는 강력한 힘인 서사로 똘똘 뭉친다.


  『아홉번째 파도』는 척주에서 벌어지는 첨예한 사건의 비밀을 파헤치는 구조로 소설을 끌어가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사랑의 아픈 조각을 펼쳐 놓는다. 세찬 파도가 밀려왔다 사라진 자리에는 가장 고운 빛깔을 가진 사랑의 무늬가 남는다. 송인화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도시 척주에서 단 한 사람 서상화를 바라보고 그리워하고 곁에 두고 싶어 한다. 나는 그들의 사랑이 미약하게나마 살아있길 바랐다.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활활 타오르다가도 어느새 식어 버려 바람을 크게 불어야만 살릴 수 있는 불씨로 남게 되는 것이니까. 그들이 불씨라도 갖길 원했다. 최은미는 이런 기대를 배반한다. 


  척주를 버리고 서울에서 송인화는 윤태진을 만난다. 같은 척주 출신으로 어릴 때 사고를 당해 평생 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남자. 송인화는 윤태진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곧 아이가 무뇌아라는 판정을 받는다. 송인화의 사랑은 이렇게 한 번 실패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밝히고 척주에서 일어나는 비밀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송인화는 복약 상담을 다니면서 약에 의존하고 급기야 중독의 증세까지 보이는 노인들의 모습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의사의 처방 없이도 약을 살 수 있는 특수함을 이용해 누군가는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최은미의 최근 소설 『정선』도 인물이 겪었던 과거의 고통을 실제 도시를 배경으로 형상화한다. 과거에 붙들린 채 현재를 사랑하지 못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홉번째 파도』 역시 인물들은 그들이 나고 자란 도시에서 상처받고 버림받는다. 그러나 상실의 고통을 스스로 치유하고자 노력하는 『아홉번째 파도』 속 인물들은 어리석게도 사랑을 믿는 자들이다. 이토록 불길하고 어두운 사랑이라니. 누구도 믿을 수 없어서 누구나 믿고 싶은 도시 척주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연재될 당시의 제목 '척주'가 더 좋았다. 강렬한 제목의 '척주' 대신 『아홉번째 파도』라는 제목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인 사랑의 풍경을 돋보이게 하고 싶었을 거라는 짐작이다. 구름과 파도가 밀려오는 백사장의 느낌을 몽환적으로 표현한 표지도 세 인물이 나누고 싶어 한 사랑의 흔적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홉번째 파도』는 척주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의 음모와 비밀을 밝혀내면서 독자를 긴장으로 몰고 가는 러브 로망 액션 스릴러 소설이다. 왠지 영화로도 만들어질 것 같은 예감이다. 음악은 마지막 장면에 한 번만 쓰이고 기괴한 사람들의 모습을 훑는 건조한 카메라의 시선이 담긴 영화를 상상한다. 영화의 제목은 『척주』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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