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선의 영역
최민우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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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민우의 소설 『점선의 영역』은 예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전쟁고아로 자수성가한 '나'의 할아버지가 까무룩 정신을 잃고 집안 식구들에게 들려주는 예언으로. 명절에 모인 식구들을 향해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들려주는 예언은 대개 불길하고 어두운 징조로 가득했다. '나'의 고종사촌에 관한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고 식구들은 무서워하면서도 섣불리 예언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수능을 보고 할아버지에게 인사하러 들른 '나'는 유과를 먹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예언을 듣는 사람이 되었다.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날 거다. 소중한 걸 잃게 된다. 힘들 거다. 용기를 잃지 마라. 도망치면 안 돼."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뜻 모를 소리를 들려주고 얼마 후 돌아가셨다. 취직을 하기 위한 대학 생활을 보내지만 졸업 후에 취직은 머나먼 행성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여겨졌다. 열한 번 취업에 실패하고 본 회사의 면접에서 '나'는 빨간 재킷을 입은 면접관에게 할아버지의 일화를 말한다. 앞날을 보는 할아버지를 둔 이상한 일을 겪은 자신은 운명 앞에 겸허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점선의 영역』은 단순히 면접에 실패하고 의지를 잃은 채 좌절하는 인물들이 나오는 소설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나'와 연인 관계인 '서진'이라는 인물은 취업 관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프니까 청춘인 암담한 인생이다. 그들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이어갈 줄 아는 사람들이다. 어차피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전언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중반부로 가면 서진이 면접에 실패한 그날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건으로 이야기의 분위기가 바뀐다. 인턴 자리에서 밀려난 서진의 행동이 돌고 돌아 면접관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된 서진은 취업에 실패한다. 


  다만 그림자가 없을 뿐이다. 그런데도 서진은 자신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가볍고 이내 행복하다고까지 느낀다.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다. 나는 서진의 그림자를 찾아 주려 하지만 실패한다. 할아버지의 예언대로 만나면 안 될 사람을 만났고 소중한 걸 잃어버린 채 도망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너무 푸르고 너무 작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점으로 기억될 우리는 그 안에서 아등바등 인생의 직선 하나 그리지 못하고 살고 있다. 이름이 있어도 숫자로 불리고 해고는 쉽고 취업은 다른 세계의 일이 되어버린 지구에서 운명이란 용기를 잃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세계에서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면 된다. 어긋나고 뒤틀린 채 살아가는 것보다 그림자를 찾아다니며 하루를 보내는 게 이상한 세계에서 통용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실패와 절망 때문에 어둠으로 도망쳐 그림자를 지우며 살아가는 우리를 꺼내 줄 수 있는 건 사랑이다. 소중한 걸 잃게 되더라도 지켜 주고 싶은 한 사람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그림자를 데리고 올 수 있다. 사랑을 쓸 수 있는 직선의 획은 그렇게 완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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