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건너오다 - 다큐 피디 김현우의 출장 산문집
김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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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체의 위치를 나타날 때 필요한 것은 기준점이다. 기준점의 조건은 이렇다. 대화하는 사람이 모두 알아야 하고 위치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기준점을 가지고 있다. 불안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축조된 기준점이든 시시각각 변하는 위치를 가진 기준점이든, 각자의 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기준점을 당신과 나는 가지고 있다. 누구의 친구, 아내, 남편, 딸과 아들로서 말이다. 설명할 수 없어 빈칸에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채 골똘한 생각에 잠길지라도 이내 우리는 각자의 위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여행으로써. 


  고속버스에 앉아 잠을 청해 보려 하지만 오히려 정신만 말똥말똥하기도 하며 간발의 차이로 기차를 놓쳐 빈 역사 안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기만 할 때. 우리는 떠나온 기준점을 헤아린다. 출발 지점에 점을 찍어 방향을 가늠한다. 동쪽으로 40km, 북쪽으로 100km. 어떤 순간에는 방향을 놓쳐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 허망해지는 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문득 사는 게 그저 그렇지, 내가 돈을 버는 건지 돈이 나를 버는 건지 모를 때 이곳에서 '가장 멀리'에 해당하는 도착지로 가는 표를 끊는다. 


  김현우의 『멀어진다』는 특이한 여행 산문집이다. 책의 표지에는 '다큐 피디 김현우의 출장 산문집'이라는 표제가 박혀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알겠지만 그는 EBS에서 일하는 다큐 피디로서 이 책의 모든 여행지는 그가 회사의 업무로서 다녀간 곳이다. 책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사무엘 베케트의 묘지를 찾아간 것은 그가 유학을 했을 때의 기록이지만 나머지는 업무차 가서 일하고 보고 느끼고 쓴 기록이다. 사는 게 그저 그래서 어느 날 훌쩍 가방 하나 메고 떠난 여행의 기록이 아니다. 목적이 있으며 그의 기준점은대한민국 서울로서 절대 변하지 않는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변하지 않고 늘 같은 자리에 있는 무언가는 위로를 준다. 생각해보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대부분 변화다.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던 것이 새로 생길 때마다, 우리는 아쉬워한다. '길들여진 상태'가 편안한 만큼 의지와 달리 거기서 벗어나야만 하는 상황은 서운하고, 때론 아프다.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서 아프고, 흰머리가 늘어서 서운하고, 내일 해야 할 새로운 일은 어쩔 수 없이 두렵다. 

(김현우, 『건너오다』,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하늘엔 원래 별이 많다」中에서)


  『건너오다』는 변하지 않는 것들을 찾아가는 기록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그는 우리를 다정하게 위로하는 것이란 쏟아지는 별들, 지은 지 천오백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절 그리고 길 잃은 여행자를 위해 손짓 발짓 섞어가며 안내해주는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임을 이야기한다. 대학교 때 읽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무덤에서 그가 세상에 존재했음을 확인받고 존 버거의 현재를 만나기 위해 출판사에 찾아간다. 이 모든 행위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현재라는 순간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변하지 않고 여전히 그곳에 있는 실존을 마주하기 위함이다.


  여행자의 시간은 반복된다. 기준점에서 가장 멀리 가기를 희망한 방랑자의 시간은 돌고 돈다. 묘지 폐관 시간 때문에 오래 머물지 못해 아쉬웠던 순간을 나중의 만남으로 위로받고 존 버거를 만나지 못한 쓸쓸한 마음은 그의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환희로 바뀐다. 내가 살아온 기준점이 여전히 그곳에 잘 있는지 안도받기 위해 여행을 시작한다. 한 번 더 찾아가 익숙해진 여행지의 장소와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되짚어 보는 것으로 끝이 나기도 한다. 주소지는 그대로인데 사는 사람이 바뀌거나 건물이 사라지는 허탈감을 마주하는 것이 삶의 다른 얼굴임을 깨닫는다.


  유인원 연구소 촬영차 찾아간 오카야마에서 만난 침팬지 '잠바'의 일화가 유독 마음에 남는다. 침팬지 가족의 생활을 찍는 촬영에서 그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잠바에 주목한다. 여덟 명의(그곳에서는 침팬지의 수를 셀 때 마리라고 하지 않고 인격체의 의미를 담아 명으로 부른다) 침팬지 가족 중 알파 수컷이 아닌 잠바는 부상 중이었다. 잠바를 연구소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털은 갈색이다. 살집이 있고 우람한 몸집이다. 능란한 구애 방식은 로이에 버금갈 만큼 훌륭하다. 가끔 먼 곳을 바라보곤 한다.' 

  

  '가끔 먼 곳을 바라보곤 한다'라는 문장을 쓰기까지 연구소의 사람들은 잠바를 관찰하고 그가 시선을 두는 곳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이곳이 아닌 먼 곳. 먼 곳에 가닿은 시선과 그 시선을 바라보는 애정. 사랑이란 내가 바라보는 풍경을 함께 보는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밖에 없는 '잠바'의 소개에서 삶의 무한한 긍정을 만난다. 멀어지고 건너왔지만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길 위의 기록은 쓰는 것보다 살아가는 것이 좀 더 나은 일임을 깨닫는 것으로 끝이 난다. 끝이라고 했지만 끝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삶은 사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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