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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fi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11
강성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평점 :



0℃
-강성은
라디오를 켜 놓은 채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꿈속에는 과거의 사람들만 가득했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마저도
공동묘지와 아파트가 구분되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과 죽어 있다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
햇볕 속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제설차가 지나갔다
죽은 사람이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우리 집 지붕 위에서
라디오를 켜 놓은 채 잠이 들었다 나무 라디오는 두 개 하나를 듣다 배터리가 떨어지면 재빠르게 다른 하나를 켠다 모자라고 비어 있으면 불안하다 일어나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꿈이었다 꿈속에서눈을 맞고 좋아했다 길을 걷다가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있는 눈사람을 발로 찼다 꿈속에는 과거의 사람들만 가득했다 몸이 아픈 엄마, 우울한 동생이 나와 꿈의 무게는 늘어났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마저도 내게 인사해 주었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질문은 단 한 명도 하지 않았다 눈을 맞추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공동묘지와 아파트가 구분되지 않고 버스 정류장에 앉아 높이 올라가는 아파트를 쳐다보아도 그 속에 사람이 살아갈 내일은 보이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것과 죽어 있다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 꿈에서 깨어나 햇볕 속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제설차가 지나갔다 발로 차 버린 눈사람이 거기 있었다 죽은 사람이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나무 라디오는 두 개 죽은 자들의 연주를 듣는다 우리 집 지붕 위에서


Ghost
-강성은
나는 식판을 들고 앉을 자리를 찾는 아이였다
식은 밥과 국을 들고 서 있다가
점심시간이 끝났다
문득 오리너구리는 어쩌다 오리너구리가 된 걸까
오리도 너구리도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하며
긴 복도를 걸었다
교실 문을 열자
아무도 없고
햇볕만 가득한 삼월
식판을 들고 급식실을 나왔다. 시멘트 의자 위에 앉았다. 엉덩이는 대신 시원했다. 국에 밥을 말고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급하게 먹었는데도 체하지 않았다.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아 다행이었다. 김치 국물이 교복 소매에 묻으면 식판을 두고 수돗가로 달려가 씻었다. 돌아오니 식판이 사라졌다. 탕수육 두 개, 뜯지 않은 조미김이 있었는데.


저녁의 저편
-강성은
여자는 그에게 저녁을 먹으러 올 수 있는지 물었다 전화를 끊자 막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새들이 자꾸만 유리창에 부딪쳐 떨어졌다 여자는 갑작스런 코피가 멈추지 않아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새로 산 양탄자에서 화약 냄새가 났다 조금씩 빗방울이 굵어지는데 새들은 자꾸 날아와 부딪치고 여자는 코피가 멈추지 않아 그대로 누워 있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새들은 무엇을 보고 돌진해 오는 걸까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누가 이 많은 새들을 날려 보내고 있을까 우리에게 왜 이런 계절이 닥치는 걸까 생각한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그는 마치 유령처럼 보였는데 머리에 쌓인 흰 눈을 털었다 여자는 일어나 침착하게 음식을 내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주 앉았다
가끔 정신 나간 새들이 집으로 들어왔다. 창문과 문을 열고 막대기를 들고 길을 안내해 주었다. 적막이 소란스러움으로 바뀌곤 하였다. 둘러앉아 밥을 먹는 일이 힘들어지고 여름은 끝을 모른 채 패악을 부린다. 가을이 시작하고 겨울이 우리에게 도착할까. 의문을 담아 국수를 삶는다. 기름때를 닦아내고 노란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다행히 이곳의 불안은 수신되지 않는다. 아픔을 이야기하지 않는 대신 가벼운 행복을 수다하는 오전. 질문하지 않는 대화 속에서 스스로 이야깃거리를 찾느라 골똘한다.


Lo-fi 뒤표지 글
-강성은
작년에는 남자였다가
올해부터 여자가 된 사람
어제는 노인이었는데
오늘은 아기가 된 사람
작년에는 동물이었다가
올해부터 식물이 된 사람
어제까진 지구인이었는데
오늘은 외계인이라는 걸 알게 되고
겨울이면 얼고
봄이면 녹는
불 없이 타오르고
물 없이 익사하는 사람
많은 창문을 가진 사람 바람 부는 밤 덜컹이는 덧문들을 그는 어떻게 잠재울까 모르는 길들이 대추 잎사귀처럼 반짝거리며 나타났다 암모니아 애비뉴를 들으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간 아이를 생각했다
당신은 시의 목소리를 듣습니까. 매일 신간 목록에는 시가 올라오고 있는데 시를 찾는 사람들은 줄어듭니다. 아닐지도 모릅니다. 시가 쏟아지는 이유는 시를 찾는 이들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가능한 추측을 하며 저음질로 수신되는 시를 읽어 갑니다. 시집은 시인의 목소리로 가득합니다. 그가 빈 방에서 녹음한 시들은 불량 음질입니다. 볼륨을 높여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빛을 끌어모아 시집에 적힌 말을 읽어갑니다. 지구 온난화가 심해지는 지구에서 탈출하고 싶어 보내는 미약한 신호의 시가 녹음됩니다. 길을 잃은 외계인이 탄 우주선이 전파를 감지하고 도와주러 오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신호는 쌓이고 가난한 시인은 얇은 시집 한 권을 내는 일이 전부입니다. 아이들은 놀아주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계시를 받고 예언을 들을 줄 알았는데. 폭발이 일어나기 전 나를 구하러 달려오지 않겠습니까.

대충 불리다가 죽는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