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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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수아를 읽는다는 것. 경제를 가르치던 선생이 어느 날 교단 위에 한 권의 책을 따로 올려 두는 걸 유심히 봤다. 그녀의 수업은 정직했고 아이들은 자주 졸았다. 수업 이외의 말은 잘 하지 않았다. 교과서와 같이 들고 온 책은 배수아의 『이바나』였다. 딱딱하고 빨간 책. 내가 그 책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은 그즈음 나 역시 배수아를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와 『붉은 손 클럽 』같은 책을 한 권씩 사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을 읽어 갔다. 머리는 좋지 않았고 평범했다. 평범함을 문학적인 것으로 가리려고 했다. 내가 읽던 책들, 읽고 있는 책으로 말이다. 평범한 아이로 살고자 했으면서도 모두의 관심을 원하는 이중적인 시기였다. 


  대학에 오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고 쓰면 좋겠지만 사는 곳의 위치와 우울함의 강도가 높아진 것 외에는 변화가 없었다. 소설을 쓰고자 하는 마음은 주눅이 든지 오래였다. 도서관의 어두운 곳에서 숨어 있었다. 마음에 들어 한 이가 말해준 사실 하나. 배수아는 소설을 쓰기 전에 공항 입국 심사대에 앉아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주는 일을 했었다는 것. 처음으로 쓴 소설로 데뷔를 했다는 것. 그동안 읽어온 배수아의 이면에 그런 일들이 있었다니 지금까지 내가 읽은 건 무엇인가. 어쨌든 나는 그 이야기를 해준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수아를 더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 꿈을 꾼다. 어쩌면 꿈을 꾸기 위해 잠드는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꿈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뺨을 얻어 맞고 소리를 지르는 등의 난폭한 행동을 한다. 꿈에서도 이건 꿈이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라며 이상하게 군다. 꿈에서 나는 죽은 엄마와 대화를 하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에게 다가가 욕을 퍼붓기도 한다. 한동안 누운 엄마와 이야기를 했는데 말을 하는 도중에 엄마의 얼굴은 검게 썩어 들어가기도 했다. 깨고 나서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면 동생은 아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전에 엄마가 남긴 말 중에 기억이 나는 게 있다. 점쟁이가 그랬는데 네가 열세 살을 넘기면 살고 못 넘기면 죽는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열세 살에서 한참을 살고 있다. 대신 엄마가 떠났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中에서, 배수아.)


  교사인 '나'는 매일 아픈 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네 명의 소녀를 모아 매주 시골집에서 소풍을 갖게 해주고 싶은 나는 반 아이들 중 한 명인 키카 큰 소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 그 소녀는 주변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유독 키가 작은 아이인 리우진과만 만난다. 네 명의 소녀를 모으는 일은 키가 큰 소녀를 집에 초대하기 위함인데 아이는 네 명을 모으지 못한다. 전화를 건 나에게 동생은 어린 시절은 모두 망상의 형태임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배수아를 읽던 고등학생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랬을지도 모른다. 경제 선생에게 저도 배수아 좋아해요라고 말해 보았지만 선생은 못 들은 척 교실 밖을 나갔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해와 공감을 얻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가 배수아를 안다는 것을 함께 하고 싶었다. 배수아의 소설집 『뱀과 물』은 지독한 꿈과 불길한 환상을 연주한다. 인물들은 현실에서 이탈한 채 기차를 타고 침목 위에 누워 있거나 도시 밖으로의 탈출을 꿈꾼다. 유원지 안의 컨테이너 안에 '나'를 버리고 간 아버지를 찾는 여행은 꿈속으로 경로를 우회한다. 학교에 나오지 않은 친구의 소식은 죽음이라는 비밀 암호로 둘러싸인 편지로 수신된다. 


  전학을 간 학교에서 꿈을 꾸는 여교사를 만나 환상에 빠지고 유방암을 앓고 있는 자신이 나의 엄마라고 우기는 여자의 머리맡에 놓인 두 개의 썩은 달걀을 보기도 한다. 문장은 소설의 서사를 따라가기 위함이 아닌 인물의 내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대로 쓰인다. 자주 집을 잃고 책가방에 책과 옷가지를 싸는 일이 1분도 걸리지 않은 묘기를 부릴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나는 그 문장을 읽어간다. 살 곳을 찾아 기차와 버스를 타고 검은 바다 앞에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던 시절로 『뱀과 물』의 세계는 데려간다. 


산다는 것은 그냥 거울 속에서 영원히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 저절로 있다가, 언젠가 그레이하운드를 타러 가게 될 것이라고.

(「도둑 자매」中에서, 배수아)


  꿈과 현실의 서사는 뒤섞인다. 인과 관계를 따지는 것보다 문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따라가는 것이 좋다. 배수아를 읽을 때에는. 공항 입국 심사대에 앉아 사람들의 여권에 도장을 찍는 모습을 상상하면 배수아의 문장이 낯설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계를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한 때의 시원으로 첫 소설은 탄생한다. 배수아의 소설이 책장에 꽂히는 걸 볼 때마다 질투와 환희가 동시에 찾아왔다. 


  거울 밖으로 탈출한 소설 속 인물들은 반대편에서 우리에게 그 자신의 꿈을 들려준다.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이 들기 전 꿈을 꿀 수 있도록 비는 것이다. 나는 이제 어린 시절이 없다. 유년의 기억을 죽은 엄마가 전부 가져가 버렸다. 종종 꿈에서 우리는 만난다. 이곳의 고민을 이야기해보지만 죽기 직전의 고통스러운 얼굴만을 보여준다. 가혹한 세계에서 만나 비밀을 나눠 가지고도 오래 함께 할 수 없었다. 꿈의 자리를 더듬으며 현실로 돌아온 배수아의 인물들에게 나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조각들을 받아 든다. 


  어쩌면 배수아를 좋아하고 소설책을 사서 모으던 사람과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대화는 내가 만들어낸 망상일지도 모르겠다. 여기 이 작은 세계에서 소설은 자주 왜곡된다. 나는 배수아의 소설을 오독하는 것으로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비좁은 입구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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