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줄리언 반스의 문장은 나를 과거라는 별로 데려간다. 광활하여 모래바람만 불고 소리쳐 불러도 아무도 없는 고독의 기억만이 자리 잡은 그 별로. 문장을 읽어가다가 나는 별의 기억 속으로 소환된다. 머뭇거리고 전부 이야기할 수 없다는 식의 화자의 서술에서 뒷모습을 보여주며 걸어간다. 사랑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연애의 기억』은 우리에게 단 하나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면 그건 사랑이었다,고 말하는 소설이다. 소설의 끝으로 갈수록 독자는 헷갈릴 수도 있겠다. 사랑이었다면 죽음 뒤에 우리가 가져가야 할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힌다. 


  없다. 죽음이 우리 곁을 찾아와 머무는 순간까지도 사랑은 없다. 이제 우리는 순진하지도 않으며 열정은 내다 버린 지 오래다. 사랑의 순간에 머물렀던 기억이 남았다. 진실은 사라지고 기억만이 우리를 고독의 별로 안내한다. 열아홉 살. 케이시 폴은 어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빌리지의 테니스 클럽에 가서 젊고 가문이 좋은 여자애를 만날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폴은 어머니의 신념과 고집을 무너뜨리기 위해 애를 쓰지 않는다. 그저 한 여자를 만나 테니스를 치고 사랑에 빠질 뿐이다. 


  마흔여덟. 수전은 딸이 둘 있고 가끔은 정원사 흉내를 내는 남편과 결혼 생활을 유지 중이다. 각 방을 쓰고 있으며 남편의 눈을 본지 오래되었다. 폴은 테니스를 함께 친 뒤 수전을 집으로 데려다준다. 젊은 남자에게 부여되는 평판이라는 것이 있다면 폴의 어머니는 그가 이제 택시 운전사가 되었다는 말로 그 일을 비아냥거린다. 수군거림, 비아냥, 남의 시선을 뒤로하고 그게 있다 해도 무시해 버리고 그들은 스물일곱 살이라는 나이를 뛰어넘는 사랑에 빠진다.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래도 이 정도는 발견했다. 첫사랑은 그 뒤에 오는 사랑들보다 윗자리에 있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 존재로 늘 뒤의 사랑들에 영향을 미친다. 모범 노릇을 할 수도 있고,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뒤에 오는 사랑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다. 반면 더 쉽게, 더 좋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물론 가끔은, 첫사랑이 심장을 소작(燒灼) 해버려, 그 뒤로는 어떤 탐침을 들이밀어도 흉터 조직만 나올 수도 있지만.

(『연애의 기억』中에서, 줄리언 반스)


  세상의 통념과 형식을 깨는 그들의 만남은 폴과 수전을 알 수 없는 사실들로 가득한 시제인 미래로 데려간다. 폴은 오십 년도 더 지난 사랑의 이야기를 기억으로 어루만진다. 가끔 쓴 일기 속에서 떠올려 보기도 하고 인과 관계가 맞지 않는 기억을 풀어 놓기도 한다. 사랑은 구체성이 없는 행위라는 것을 그 자신이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 하나의 이야기에서는 폴은 기억을 이야기하면서 '나'라는 일인칭을 사용한다. 둘의 이야기에서는 객관화를 목표로 '너'라는 이인칭, 셋의 이야기는 '그'라는 삼인칭으로 거리 두기를 시도한다. 


  실패. 추측대로 폴은 사랑의 이야기 안에서 패배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자 폴도 나도 실패의 예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랑의 실패는 삶의 실패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랑, 삶, 구원에서 우리는 실패하기 때문에 죽음으로 갈 수 있을 뿐이다. 죽음이 연애를 갈라 놓은 것이 아니라 연애의 기억이 우리를 마지막에 부여받은 축복으로 안내한다. 그것이면 된다.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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