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행기를 타 본 적은 없다.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려 본 적은 있지만. 가끔 야간 비행을 하는 비행기의 불빛을 보고 잘못 날아온 별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알 수 없는 세계는 그토록 연약하고 믿을 수 없는 것. 외국 영화에서 본 비행기 관련 소재는 납치, 시간 여행, 불시착, 사라진 아이를 찾기 위한 고군분투였다. 승객들은 혼돈에 빠지고 주인공들은 대게 기지를 발휘해 행복한 결말로 우리를 안심시킨다. 허구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비행기를 겪었을 뿐이다. 하늘 위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일들을 겨우 뉴스로 보고 들었다.


  시작은 땅콩 한 봉지였다. 승무원은 사과하고 사무장은 미국 공항에 홀로 버려졌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의 말은 틀렸다. 그는 사고를 일으킨 경영진인 당사자가 업무에 복귀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그녀는 봉사 활동을 하고 반성한다는 몇 마디의 말을 한 뒤 경영에 복귀했다. 한국은 그런 나라다. 문화의 최고 지위를 가진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소설가는 한국을 모른다. 땅콩 회항이 있고 이번엔 물컵이었다. 언니는 땅콩. 동생은 물컵. 시작은 미미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를 보여주고 있다. 광고 회사 직원들에게 폭언을 하고 물컵을 집어던졌다는 의혹에 휩싸인 동생의 수사는 항공사의 탈세와 밀수입으로 조사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외국으로 수출된 한국어 '갑질'은 이제 대한민국을 수식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했다. '갑질'은 외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따로 번역을 하기 힘들어 우리가 쓰는 언어 그대로 내보냈다. 부끄러움을 수출하는 나라다, 대한민국은. 이제 우리는 갑과 을이 아닌 을과 을의 대결로도 나아가고 있다. 박민정의 소설 『미스 플라이트』는 주인공 유나와 아버지 정근이 겪은 을과 을의 부끄러운 대결을 다룬다. 임용고시를 공부하다 항공사 승무원이 되기로 한 유나는 B항공에 입사한다. 자부심보다는 수치와 모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직 공군 대령이기도 했던 유나의 아버지는 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딸이 일한 하늘에서는 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아버지 정근은 고등학교 이후 절연했다시피 한 딸이 살았던 인생의 행로를 찾아 나선다. 소설은 유나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와 정근의 서사, 유나의 남자친구였던 주한의 시점으로 풀어간다. 유나가 겪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녀의 어린 시절을 지탱했던 부끄러움에 대해 추측할 뿐이다. 


  대령의 운전을 도맡아 하고 임무가 아님에도 대령의 사모, 딸의 운전을 해야 했던 사병 영훈의 이야기를 통해 유나가 느꼈던 사회의 부조리는 그녀가 어른이 되면서 더욱 커진다. 물길을 막는 공사를 하고 비행기 수리에 들어갈 돈을 나눠 먹느라 사람들이 죽고 비리를 폭로하려다 오히려 내부 고발자로 몰려 자살을 하는 대한민국에서 유나의 꿈은 불시착한다. 같은 팀 안에서 간절함을 이용해 어느 한 명을 엑스맨으로 지정해 고발을 시키는 B항공에서 유나는 좌절한다. 


  면세품을 팔지 못하면 승무원이 직접 사야 한다. 승무원을 검색하면 딸려 나오는 야한 사진들을 보고 경악한다. 이러한 소설의 내용이 충격적이지 않았던 건 이미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로 충격 회로가 무뎌졌기 때문이다. 타국에서 가방 하나와 버려졌던 사무장이 있었고 차마 얼굴을 보여주지 못해 가면을 쓰고 나와 집회를 하는 항공사 승무원들을 보았다. 회장님이 들어오시면 나란히 서서 꽃다발을 주고 노래를 부르며 환영 인사를 해야 했다. 


  유나와 정근은 을이었다. 그들은 을들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같은 을끼리 대결하고 실패했다. 이제 대한민국의 갑들은 자신들이 직접 칼자루를 빼서 휘두르지 않는다. 권력과 돈으로 을을 사서 을들을 겨냥하게 한다. 생계라는 약점을 쥐고 흔드는 갑에 맞서다 실패한 유나가 우리에게 던지는 마지막 한 마디를 안고 지상으로 돌아온다. 『미스 플라이트』는 연대와 공존이라는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가치를 들려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