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돼가? 무엇이든 -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이경미 첫 번째 에세이
이경미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중국 소설가 위화가 라디오 방송에 나왔을 때의 일이다. 진행자가 당신의 성공 비결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단숨에 운이 좋아서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통역사도 진행자도 함께 웃었다. 열심히 했다, 좋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뻔한 말이 들려올 줄 알았다. 위화는 그저 운이 좋아서라며 담백하게 말했다. 진행자도 손뼉을 치면서 맞다,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내용은 다 믿을 수 없다. 성공하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며 크게 웃었다. 원래 좋아하던 작가였는데 그때 이후로 더 좋아져서 책을 찾아 읽었다. 


  원래는 치과 의사였다. 공산주의 국가라 수입은 시원치 않았다. 맨날 썩은 이를 들여다봐야 했다. 당에 속한 작가들은 놀러 다니면서 창작 활동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부러워서 글을 썼다. 계속 썼는데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진 못했다. 두 번째 장편 소설 『살아간다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후에 장이머우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유명세를 떨쳤다. 


  어쩌다가로 시작한다. 하늘의 기운, 우주가 도와줘서라는 허황된 소리 말고 운이 좋아, 어쩌다가 성공한다. 성공의 정의도 주관적이라서 그저 잘 데 있고 하루 세끼 따뜻한 밥 먹을 수 있을 정도여도 성공으로 여긴다. 더러 자기 계발서를 읽기도 한다. 성공하는 자의 습관이라고 읽어보면 나와는 거리가 멀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메모 열심히 하고 항상 긍정적인 사고를 하라고 한다. 반대다. 늦게 일어나고 일기도 겨우 쓰고 매사 부정적인 생각으로 하루를 보낸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고(7월에 쓴 전기의 양을 계산하면서 얼마 나올지 고민하고 의료보험은 왜 아직까지 안 나오나 연체되면 돈 더 내야 하는데 같은 비루한 걱정들) 타인의 표정을 살피며 나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건가 멍청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아랫집≫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이경미 감독의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을 읽으며 이거 내 얘기임? 내가 쓴 거 아니야?라는 공감이 마구 들었다. 이십 대 시절 첫 직장에서 겪은 일들이며 때려치우고 영화 학교에 들어가 안 되는 시나리오를 쓰기까지 어찌어찌 영화는 만들었는데 흥행이 안돼서 절망에 빠진 최근의 일까지 담담하고 솔직하게 그려 냈다. 영화를 보기만 했지 영화를 만드는 세계를 알지도 못하는 한국 영화 애호가인 나는 이런 이야기가 좋다. 짤막하게 쓰인 일기의 문구들이 마음에 와닿는다. 쓰레기를 쓰겠어라고 다짐하니 쓰레기가 써진다는 일기. 


  여신 이영애가 처음으로 단편 영화에 출연한다는 기사를 봤는데 이경미 감독의 작품이었다. 영화 ≪아랫집≫의 모티브는 감독의 실제 이야기였다. 제발 베란다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의 글을 절절히 썼는데 아랫집 남자는 감독을 뻔뻔함으로 쩔쩔매게 만들었다. 여자 혼자 살면 다 그러진 않겠지만 무서운 일이다. 전화번호 알아내서 매일 금연 일지를 보내고 밥 먹자고 연락하다니. 세상 끔찍하다.


  홍조 띤 얼굴로 열연하던 공효진의 분신은 감독 이경미였다. 딸의 행방을 찾으며 가위를 손등에 쑤셔 박고 갈비뼈가 부러지면서도 뛰어다니던 손예진은 이경미 감독의 일부였다. 이영애가 헬스 기구를 타며 아랫집을 공격하는 장면은 윗집 여자 이경미의 소심한 복수를 영화화 한 것이었다. '방구석 1열'에 나와 자신의 영화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하던 감독 이경미는 불면증을 달고 살 때 엄마가 보내준 문자를 지우지 않고 아직도 읽는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비밀은 없다≫이야기를 했으니 ≪미쓰 홍당무≫를 한 번 더 소개해 달라며 웃는 이경미는 고기를 좋아한다. 


  성공했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8년 동안 쓰고 준비한 영화가 잘 안돼서 절망에 빠져 있었다. 집 안에 틀어박힌 감독을 임필성 감독이 데리고 나갔다. 고깃집에서 ≪비밀은 없다≫를 좋아한다던 영화 기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결혼도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이런 상투적인 고사성어까지는 안 쓰려고 했지만 딱히 비유할 말이 없다. 감독이 밝힌 대로 300만 명을 잃고 한 명을 얻었다. 나쁜 일 뒤엔 좋은 일. 좋은 일 뒤에는 좋은 일이 있으면 좋겠지만 고사의 이야기처럼은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인생이란 게. 


  몸에 좋다는 약을 때려 먹고 박찬욱 감독의 마늘 액기스도 훔쳐 먹는다. 전세 난민이 되어 우울해 있다가도 거금 4만 4천 원을 들여 장을 본다. 『잘돼가? 무엇이든』은 성공한 감독의 성공기가 아니다, 절대. 절대라는 부정은 이경미 감독이 성공을 안 했다는 것이 아니고(긁적긁적) 내가 이만큼 되기까지 이런 좌절을 겪고 이겨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되지도 않는 감정 과잉의 기록이 아니란 소리다. 오해하지 마시라. 


  이 책은 사회성이 떨어지고 영양제 폭식을 일삼고 내 테이블에만 물을 가져다주지 않아 분노가 나려다 이게 아닌가 다시 소심해지는 한 사람의 괴랄한 기록이다. 인생의 낭비가 있다면 지나온 시절을 함부로 쓰고 방치하고 내버려둔 청춘을 보낸 기억이다. 박민규의 수필 「푸를 청 봄 춘」에 나오는 구절처럼 아직 우리에게 청춘은 오지 않았다. 청춘을 허무맹랑하게 보낸 자들이 청춘을 살 준비가 되어 있다. 쓰레기라도 쓰고 싶은 심정으로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를 준비하는 청춘의 시절은 끝나지 않았다. 여기, 무엇이든 잘 돼가고 있는 청춘들에게 보내는 책이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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