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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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질지 선택할 권리가 없거든."

핼로런 씨가 내게 했던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맞는 말이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다. 충동이다. 이제는 알겠다. 하지만 가끔은 선택해야 하는 때가 있을지 모른다. 최소한 사랑에 빠지지 않는 쪽을 선택해야 하는 때가. 저항하고, 거기서 멀어져야 하는 때가. 핼로런 씨가 댄싱 걸을 사랑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C.J 튜더, 『초크맨』中에서)


  C.J 튜더의 데뷔작은 『초크맨』은 놀랍다. 여름을 맞이하여 영국에서 날아온 스릴러 한 편이 더위를 잊게 만든다. 잘 짜인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소설은 성장 소설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 뻔한 성장 소설이 아니어서 이야기를 주무르는 솜씨가 만만치 않아서 놀랍다. 신인 작가이지만 대가의 능수능란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야기를 많이 쓰고 읽은 자의 소설이다. 어느 지점에서 독자의 호흡을 멎게 하고 다시 숨을 쉬게 할지를 알고 있다. 


  소설은 앤더버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열두 살을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애드워드 애덤스이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에디라고 불리는 '나'와 뚱뚱이 개브, 메탈 미키(교정기를 끼고 있어서), 호포와 니키는 한동네에서 나고 자라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며 어울려 다닌다. 자전거를 타고 숲속 주변을 떠돌고 뚱뚱이 개브의 생일날이면 어떤 선물을 줘야 개브가 좋아하지를 고민하는 아이들이다. 


  축제 때 아름다운 댄싱 걸의 사고 현장을 에디는 바로 앞에서 목격한다. 댄싱 휠의 축에 달린 회전 링이 부러지면서 댄싱 걸의 얼굴과 다리를 자르고 지나갔다. 에디는 숨이 막혀 도망가려고 한다. 바로 옆에 쓰려진 댄싱 걸이 에디에게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때 얼굴이 하얀 남자가 나타나 다친 아가씨를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을 차리고 에디는 남자의 말대로 댄싱 걸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응급 처리를 잘한 덕분에 댄싱 걸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을 살리고 다리를 접합했다. 신문에서는 하얀 남자와 에디를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얼굴이 하얀 남자는 핼로런이라는 이름의 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는 마을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먼저 들어와 있다가 사고를 목격하고 댄싱 걸을 구했다. 그녀의 이름은 일라이저였다. 끔찍한 사고였지만 일라이저는 살았고 관심도 줄어들었다. 에디와 친구들의 열두 살의 시간을 천천히 흘러갔다. 뚱뚱이 개브의 생일날 누가 준지도 모를 분필 여러 통을 받기 전까지 아이들은 장난과 악의 섞인 농담을 반복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여러 색깔의 분필로 무얼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각자를 나타내는 색깔로 암호와 분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놀이터로 와, 숲속으로 라든지를 표시하는 기호와 초크맨을. 소설의 시간은 에디와 친구들이 열두 살인 1986년과 삼십 년이 흐른 2016년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초크맨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마을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먼저 에디가 메탈 미키의 형에 의해 폭행을 당했다. 에디는 메탈 미키의 형을 피해 다녔는데 초크맨을 보고 미키가 부른 줄 알고 놀이터에 갔다. 추잡한 짓을 당하고 있을 때 핼로런 선생님이 와서 구해 주었다. 


  자전거를 아끼던 메탈 미키의 형이 물속에 처박힌 자전거를 구하려다 사고를 당했다. 자전거가 너무 무거웠다. 미키의 형이 죽은 곳에 초크맨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니키의 아빠 마틴 목사가 폭행을 당했다. 그 옆에도 초크맨 그림이 잔뜩 있었다. 사고가 날 때마다 초크맨이 그 옆을 지켰다. 숲속에서 일라이저의 토막 난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이 있는 곳까지 초크맨이 안내했다. 


  2016년의 에디에게도 초크맨 그림과 분필이 날아왔다. 치매로 기억을 잃어 죽어간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단어와 싸우는 에디는 어른이 된 미키의 방문을 받는다. 미키는 삼십 년 전에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에디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다. 그리고 일라이저를 죽인 범인을 안다고도 말했다.


  스릴러의 겹을 쓴 성장 소설인 『초크맨』은 어른이 될 수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나이를 먹고 배가 나오고 머리가 벗어지고 기억력이 가물 해져도 어른이 될 수 없는 아이들이 나온다.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 결과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영원히 아이를 살고 있다. 함부로 예단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미화한다.  『초크맨』은 아이들의 세계는 명랑하고 밝은 기운으로 가득해야 한다는 관념을 집어넣는 어른에게 날리는 강력한 한 방이 담긴 소설이다. 우리는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의 악마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고민하면서 나이를 먹어간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 쪽을 선택한 사람만이 어른의 세계로 넘어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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