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평전 - 문익환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 문익환 평전
김형수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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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가능한가. 만나서 이야기 한 번 나누지 못한 사이면 더더욱 알 수 없지 않을까. 시인이면서 소설가이기도 한 김형수에 의해 쓰인 『문익환 평전』을 집어 들면서 든 생각이다.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알고 싶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특별판 『문익환 평전』이 나올 때 한반도는 평화의 물결로 요동쳤다. 세상의 날 선 비판을 가하고 온몸으로 민주화를 끌어안은 그의 호 늦봄에서처럼 우리는 늦봄, 걸어서 두 정상이 만나는 꿈같은 장면을 마주했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 

-문익환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 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 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마음이었거든 

한마음 

그래 그 한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 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면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을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사는 거지 


  신학자, 목회자, 시인, 번역가, 언어학자, 시대의 꿈과 사상을 실천하는 예언자. 늦봄 문익환의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그가 일흔두 살에 쓴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대로 그는 평양에 갔다. 비록 걸어서 가지는 못하고 베이징 공항에서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지만. 그는 갔다. 1989년 3월 25일의 일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그들을 괴뢰, 인민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동무라는 가장 예쁘고 친근한 말로 그들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고 했다. 


  윤동주와 시 공부를 하고 그가 문익환이 쓴 모자를 부러워하자 호떡 몇 개와 바꾼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쓴 시를 윤동주가 그것도 시인가, 말해서 그는 시를 포기했지만 그의 안에 있는 시의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만으로 쉰셋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쉰여섯에 첫 시집 『새삼스러운 하루』를 출간해놓고 순수하게 기뻐하던 모습을 시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늦봄. 히브리어 성서를 번역하고 목회자의 길로 가던 그가 시대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 이후였다.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던 전태일은 노동 현장의 가혹함을 알리고자 온몸에 불을 질렀다. 그가 죽으면서 끝까지 외쳤던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지금 2018년에도 유효하다. 늦봄은 그렇게 더디 시대를 건너왔다.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유신 체제에서 독재의 부당함을 알리는 곳에 그는 늦게 온 봄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남과 북이 하나의 길로 가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던 그는 온밤을 꼬박 새워 시를 쓰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로 그는 시의 운명을 받아들고 걸어갔다. 평양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인간의 명이니 시간의 흐름이니 따지지 않고 그와 함께 2018년의 늦봄을 맞이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걸어서 우리는 만났다. 마주 잡은 손을 흔들고 가슴 설레는 말을 그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생애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의 길을 안내하는 대로 책장을 넘길 뿐이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김형수의 언어로 쓰인 『문익환 평전』은 소중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출생과 죽음 사이의 길을 따라 걷는 작가의 운명 또한 늦봄의 계절과 만나 평화의 길로 안내받는다.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서로를 그리는 마음으로 걸어서 평양으로 신의주로 가는 여정에 늦봄과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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