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변에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

(자기 앞의 생 中에서, 에밀 아자르)


  로자 아주머니는 거대하다. 그녀의 몸무게는 95kg이 넘는다. 한때 예뻤고 말랐다. 아주머니의 열다섯 살 때의  사진을 보지 않았다면 모모조차 믿기 힘들 정도였다. 지금은 머리가 빠져 서른두 가닥 밖에 남지 않았다. 열다섯 살의 그녀는 다갈색 머리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만 로자 아주머니의 과거는 화려했고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된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칠층 아파트에 살고 창녀들이 맡긴 아이를 보살피느라 하루 종일 정신이 없는 그녀에게 세상은 위조 증명 서류 같은 곳이다. 진짜는 없고 가짜만이 판을 치는 곳.


  로맹 가리가 이름을 숨기고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은 가짜 인생을 살기로 한 작가의 세상을 향한 펀치 같은 소설이다. 한 작가에게 두 번 주지 않는다는 콩쿠르 상을 받은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는 모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안의 숨어 있는 공포와 불안을 꺼내기를 부추긴다. 암사자가 와서 우리 볼을 핥아주고 광대가 놀러와 방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 해준다. 에밀 아자르라는 가짜 이름으로 로맹 가리는 모모와 로자 아주머니가 믿는 세상에 돌을 던진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지만 사랑의 다른 이름은 사랑한 순간 이라고 말한다.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냐고 묻는다. 돈과 차, 집, 은행 예금이 아닌 사랑 없이 살 수 있냐고 묻는 모모에게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만질 수 있게 해준다. 생일도 알 수 없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모모에게 생은 우산 친구를 선사해주고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단 한 사람 로자 아주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폴란드 태생 유태인인 로자 아주머니는 젊은 시절 모로코와 알제리에서 몸으로 벌어먹고 살았다. 애인이 로자 아주머니의 돈을 빼앗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녀는 독일인 유태인 수용소에 끌려갔다. 그녀는 한밤중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두려워했으며 소리를 지르면서 자다가 깨곤 했다. 그럴 땐 지하에 마련한 유태인 동굴에 들어가 쉬곤 했다. 모모가 그곳을 발견하면서 나중에 둘은 생의 마지막을 동굴에서 보낸다. 나이가 들어 일을 못하면서 창녀가 맡긴 아이를 맡아 키우는데 그중에 모모는 특별한 아이였다. 


  모모에게 나이를 알려주지 않은 건 모모가 자신의 곁을 떠날까 봐 두려워서였다. 모모는 자신만의 감각으로 비루한 생을 마주볼 수 눈을 가지고 있다. 로자 아주머니를 힘들게 하는 슬픔을 막아 내고 혼자서 세상의 엿 같음에 맞설 준비를 하는 아이였다. 아끼는 개를 오백 프랑에 팔고 돈을 하수구에 버리자 로자 아주머니는 그런 일은 아우슈비츠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며 카츠 선생님을 찾아가 모모의 정신이 괜찮은지 묻는다.

  


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게 한다.

(자기 앞의 생 中에서, 에밀 아자르)


  흑인, 창녀, 여장 남자, 아이, 노인. 소외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모를 돌본다. 자신이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찾아와 모모를 데려가려 하지만 잠깐 정신이 든 로자 아주머니는 괜찮은 거짓말로 모모를 지킨다. 남자가 찾아와서 좋은 점은 모모의 나이가 열 살이 아니라 열네 살로 네 살의 나이를 더 얻게 됐다는 것이다. 모모는 그걸로 만족한다. 이제 혼자서도 살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모모가 바라는 생은 혼자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는 것이다. 열네 살이라는 나이는 혼자서 글을 쓰고 기분이 내키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나이다. 혼자 살 수 없다면 로자 아주머니 같은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과 춤을 추고 지하 동굴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창녀라고 해서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로자 아주머니가 수용소에서 살아 남고 예순다섯이 될 때까지 뚱뚱한 몸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세상에는 진짜가 없다는 사실을 일찍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위조 증명 서류를 만들고 빈민구제소에서 나온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일이 그녀의 생을 살만하게 만들어 주었다. 가짜로 진짜를 지켜 나가는 일. 창녀들이 찾아와 계단에서 울면 로자 아주머니는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여준다. 아이들과 자신의 삶이 가짜로 인해 고통받지 않기를 바란다. 


  자기 앞의 생을 살수 있는 자들은 가짜다. 진짜라고 우기는 자들은 믿을 수 없다. 그럴듯해 보이는 구석에는 음흉한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다. 반짝이고 휘황찬란한 겉모습에는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추악한 진실이 들어 있다. 모모와 로자 아주머니가 꾸며낸 인생 안에 그들이 살고 싶어 했던 진짜 삶이 있었다. 모모는 로자 아주머니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촛불과 향수로 그녀의 생을 감춘다. 병원에서 고통받지 않을 수 있도록 가짜 친척을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놀랄 정도로 진짜보다 가짜를 더 선호한다. 진실을 아는 것보다 거짓으로 안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주 못생긴 사람과 살다 보면 그가 못생겼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정말로 못생긴 사람들은 무언가 결핍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자기 앞의 생 中에서, 에밀 아자르)


  모모는 지금 생각해보면 로자 아주머니가 그렇게 못생긴 것도 아니라고 회상한다. 머리가 빠져 가발을 써야 하고 허리와 엉덩이가 구분되지 않는 몸. 거구의 몸으로 칠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힌 로자 아주머니. 아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창녀들을 위해 위조 서류를 만들고 글을 모르는 흑인 포주를 위해 대신 편지를 써준다.


  사랑의 이유를 찾으라고 말하는 당신은 어리석다. 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당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못생긴 로자 아주머니를 사랑하는 모모만이 사랑받을 줄 아는 생이다.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이유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