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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
하재영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개는 나에게 친근한 동물이 아니다. 개뿐만이 아니라 고양이, 쥐도, 햄스터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귀여워하고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동물들이 나는 무서웠다. 어렸을 때 개에게 물린 후로 개만 나타나면 뛰었다. 전봇대 뒤에 숨어서 개가 지나가길 바랐다. 자전거 옆에 고양이가 죽어 누워 있기도 했고 물을 받아 놓은 대야에 쥐가 빠져 죽어 있기도 했다. 친구들이 자기 집에서 기른다며 햄스터 상자를 열었을 때 나는 교실 밖으로 도망갔다. 털이 있고 작은 눈을 가지고 이빨이 있는 그것들에게 쉽게 정을 줄 수가 없었다.
사람은 변한다. 약간만.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다 보면 크게 변할 것 같지만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적응한다. 사회성이라는 게 생겨서 사회 안에서 살아가게끔 진화한다. 주인집 개가 있었고 마음대로 지은 이름을 부르면 목에 달린 방울을 흔들며 뛰어왔다. 먹이를 주고 한 번씩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오래전에 이야기이다. 지금 그 강아지는 죽었겠지 생각하며 하재영의 르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읽는다.
소설가 하재영은 어떤 시작을 계기로 개인적 체험을 한다. 피피라는 치와와 강아지를 키우면서 소설가의 인생은 변곡점을 맞는다. 우연과 필연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피피는 소설가의 집에 우연히 가게 된 것인가. 꼭 가야 할 이유가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것인가. 누구도 알 수 없다. 작고 누군가가 키우지 못할 사정이 생긴 피피가 함께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애완동물이라는 명칭 대신 평생을 함께하고 인생의 동반자라는 개념이 강한 반려동물로서 개는 사람에게 가장 친숙한 존재이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에서도 나오지만 동종보다 사람에게 정을 주고 따르는 종은 개가 유일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언젠가 아프다. 동물을 사랑하는 일은 특히 그렇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떠나고 우리는 그들보다 이 세상에 오래 머문다. 그런 줄 알았지만 여전히 모르겠는 것은, 미코야, 왜 나에게 너였을까. 왜 너에게 나였을까.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중에서 어떤 응답, 하재영-
피피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하재영은 또 다른 피피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러다 온라인에서 '뚱아저씨'를 만난다. 만남은 만남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만남을 피하지도 피할 수도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뚱아저씨'는 다이어트 컨설턴트 겸 퍼스널 트레이너라는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실의에 빠진 그는 유기견을 입양한다. 그리고 인생은 동물 구조로 이어진다.
소설가도 그렇고 '뚱아저씨'도 '행강대부'도 알 수 없는 힘들에 끌려 동물 구조의 길로 들어선다. 누가 그들의 손을 잡아 버려진 동물을 구조하고 치료하고 입양하는 힘든 길로 이끄는가. 당신은 알 수 있는가. 생각하기와 질문하기를 거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은 이야기하기를 시작한다. '동물에 대한 아무 비하도 멸시도 없이 말하건대 인간다움'을 말한다.
소설가는 취재를 위해 동물보호 단체의 활동가들과 새끼 빼는 기계들처럼 취급당하는 개들이 모인 번식장과 세상의 모든 개를 팔 수 있는 경매장을 다닌다. 버려진 개들이 가는 마지막 장소 공설 보호소, 애니멀 호더의 경향을 보이는 사설 보호소까지도. 그리고 살아서 나갈 수 없는 개들이 모인 개농장과 개시장을 간다. 길을 잃거나 주인이 버린 경우 개들은 유기견으로 취급되어 보호소에 맡겨진다. 그곳에서 개들은 열흘 동안 입양을 기다린다. 그 후에 개들은 안락사 당한다.
보호소를 운영하는 어떤 수의사는 안락사를 시키는 대신 개장수에게 개를 팔아버렸다. 시에서 주는 지원금을 받을 대로 받고 몰래 뒷돈도 챙기는 것이다. 수의사라는데 주사기 하나로 여섯 마리 개에게 주사를 놓았다. 그 개들은 감염으로 전부 죽었다. 보호소라고 사정이 나은 것이 아니다. 안락사는 고통사를 의미했다.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주입해야 하는 약물로 안락사를 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약물을 투입 당한 개들은 고통 속에서 처절하게 죽어간다. 소설가는 언어 뒤에 숨겨진 폭력성을 찾아낸다. '어떤 안락사는 고통사라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을, 어떤 입양은 죽음으로 가는 급행열차라는 것을, 언어들은 알려주지 않는다고' 쓴다.
한쪽에서는 반려동물로써 개를 키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보신으로써 개를 먹는다. 개를 먹는 사회. 돼지, 닭, 소, 오리도 먹는데 개는 왜 안되냐 반감이 드는가. 개 식용을 합법화해서 깨끗하게 도축하고 확인된 개를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질문하고 싶은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에서는 개를 시작으로 한 이러한 반감과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개식용 문제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개가 축산법에는 포함되면서 축산물 위생관리법에는 포함되지 않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즉 현행법은 개를 사육하는 것만 허용할 뿐 식품으로 도살, 유통, 판매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축산물 위생관리법 제7조 '가축의 도살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도살은 "허가받은 작업장에서 해야 한다." 그러나 개는 축산물 위생 관리법의 대상이 아니므로 허가받은 작업장(도살장)이 없다. 그래서 개를 잡아먹으려는 사람과 개를 식용으로 판매하려는 사람은 개농장, 개시장, 무허가 도축장, 개인 주택, 야산 등에서 개를 도살한다.
-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중에서 쓸모 없어진 존재들의 하수처리장, 하재영-
단순하다. 시대가 바뀌고 문화의 관점이 다양해진 현시대에 맞는 법을 개정하면 된다. 잘못된 것은 고친다. 관습에 의해 우리가 식용으로 개를 다루었다면 시대의 흐름에 맞게 법을 만들면 된다. 개식용을 합법화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동안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개식용이 합법화될 경우 개 역시도 농장동물로 편입되어 비인도적인 환경에서 키워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꼬집는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저질러지는 사람들의 추악한 이기심과 현대 축산업의 민낯을 들추어낸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은 동물복지 대신 동물권이라는 개념을 가져다 쓴다. '동물권은 동물해방과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 동물도 생명권이 있다는 것, 고통을 피하고 학대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라는 것이다. '동물보호가 인간이 주체가 되어 객체를 보살핀다는 시혜의 어감을 가진다면 동물권은 우리의 인식이나 의지와 상관없는 자연권적인 어감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다시 시작해보자. 생태피라미드를 구성하는 최종 소비자는 인간이다. 생산자부터 올라간 삼각형의 가장 윗부분을 인간이 차지한다. 동물을 함부로 대하는 사회에서 인간 역시 그런 취급을 받지 말라는 법이 없다.
동물보호단체에서 일하며 동물 구조에 힘쓴 소설가가 오랜 시간 힘겹게 써 내려간 글에서 그는 '이 이야기는 자격이 없는 자의 응답이다'라고 끝마친다. 펜션에서 만난 바둑이 미코의 죽음을 겪으며 죽음이라는 모호한 관념을 실체로 맞닥뜨린 소설가는 하나의 질문을 만들어 간다. '나는 어디에서 타자와의 공존을 시작할 수 있을까?'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은 나와 당신이 만들어갈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