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러브 유, 필립 모리스 - 천재사기꾼, 사랑을 위해 탈옥하다
스티브 맥비커 지음, 조동섭 옮김 / 북폴리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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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범죄자들의 심리를 파헤쳐 그네들의 족적을 재조명하려는 시도는 결코 낯설지 않다. 사이코패스와 탈옥수들이 실화는 관음증적인 언론의 세례와 더불어 영화화되는 수순을 거치는 것도 예측 가능한 패턴이 아니겠는가. 물론 '진실성'을 담으려는 시도가 불순함과 억측으로 변질되는 것 또한 범죄의 재구성 과정에서 재기되는 태생적 한계라고도 할 수 있겠다. 미디어믹스로 재창출 되는 화려한 범죄행각을 바라보는 입장은 점차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면서.
 

그가 어떻게 희대의 사기꾼을 거듭났는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소스를 제공하는 것이 대부분이 사기꾼 자신인 경우, 그 이야기의 '진실성'은 과연 신뢰할만한가를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을 인정하자. 그렇다면 얼마나 더 화려한 범죄행각이 펼쳐지는가가 강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읽는 내내 불편함을 감출 길이 없다는 것에 자신의 윤리지수를 테스트 당한 기분에 찜찜해지기도 한다.

 

짐 캐리,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아이 러브 필립 모리스>의 동명의 원작소설은 '흥행'의 요소가 가득한 사기행각의 교과서적인 총체를 구현하고 있다. 경찰이자 모범적인 가장이었던 스티븐 러셀이 미국의 교도행정의 온갖 맹점을 공략하며 탈옥에 탈옥을 거듭하며 전국구적인 명성을 얻는 과정은 '엔터테인먼트'하긴 하지만 읽는 내내 지칠 수밖에 없었다. 범죄자의 자기변명의 꽤 커다란 발언창구 같은, 원작자마저도 그의 수완에 넘어가버린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온갖 공문서 조작과 사칭을 거듭해 고액연봉자의 대열에 얼마든지 합류할 수 있었던 스티븐 러셀은 교도소 안에서 만난 운명적 사랑, 필립 모리스와의 애정행각을 위해 변호사를 사칭해 거뜬히 형량을 줄이고, 탈옥마저 서슴치 않는다. 도피의 와중에도 이력을 세탁해 또다시 유력회사의 재정담당자로 일하며 그의 천직처럼 느껴지는 횡령을 벌이기도 하고, 당연한 수순처럼 체포, 탈옥, 도피, 체포의 과정을 반복하며 교도행정의 살아있는 공공의 적으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스티븐 러셀은 필립 모리스와의 애정문제만이 자신의 이성적 판단을 흐리는 유일한 약점이라고 말하는데, 애정의 '진실함'이 그의 사기행각을 흐릿하게 만드는 대외적 이미지를 조성하는데 일조한다고 보여 지기도 한다. 그의 형량이 무거워지는 것만큼이나.

 

스티븐 러셀은 에이즈로 가장해 유유히 탈출, 사망으로 위장해 법의 추적을 따돌리기도 하고, 구제 불가능한 무기징역으로 수감 중인 지금도 탈옥의 기회가 없진 않다는 여유 자적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의 영원한 사랑, 필립 모리스도 다른 곳에서 복역 중이긴 하지만 그들의 애정은 이제 원작과 영화 속에서 만큼이나 '로맨틱'할 순 없어도, '탈옥의 달인'이 만들어갈 여지가-

  

범죄를 예고하며 범행의 장소에 나타나 관계자들을 농락하며 '성공'을 연출해내는 뤼팽을 무색케 하는 스티브 러셀의 범죄행각은 픽션이 아니기에 더욱 더 고약하고, 애정문제와 동반해 더 많은 사기행각의 시너지의 향연이며, 공공의 윤리관과 상식이 곧 범죄의 사각지대로의 치환이라는 공식을 풀어내고 있는데, 당신이 사기꾼이라면 혹은 유용할 수도 있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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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는 법 그림책은 내 친구 22
콜린 톰슨 글.그림, 이지원 옮김 / 논장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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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버린 불가사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고 있어왔다. 물론 종이책을 전부 폐기하고 전자책만으로 운영되는 도서관이 생겼다는 해외토픽이 일상적인 일이 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책'의 효용가치가 사라진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독서가, 장서가, 애서가, 탐서가들 사이에서의 궁극의 코드, 그것은 '저주받은 책들의 무덤'일 수도 있고, '꿈꾸는 책들의 도시'일 수도 있고, '바벨의 도서관'이라 일컬어지는 공간에 대한 열망은 얼마나 거대한 것일까.  

콜린 톰슨은 『영원히 사는 법』에서 바로, 이 '지금까지 출판된 모든 책이 꽂혀 있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이 궁극의 도서관에서는 딱 한 권의 책만이 분실된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전해진다. 바로 <<영원히 사는 법>>이다. 관람객이 모두 나가버린 후 야심한 밤이면 되살아나는 자연사 박물관처럼, 이 도서관 또한 어둠이 내리면 책장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는데 책은 곧 삶은 담은 그릇이 되어, 저마다의 인생들이 깃든 도시이자, 안식처로 화한다. 

<<영원히 사는 법>>에 대한 의문을 간직한 소년, 피터는 책을 찾아 영생을 얻기 위한 탐사를 계속해나가는데, 이 끝도 없는 인류 지식의 총체인 도서관 왕국의 서가를 누비는 일은 바다에 빠뜨린 바늘 찾기만큼이나 가망이 없어 보인다. 그의 여정에 따라 펼쳐지는 책 도시의 풍광은 일상이라는 삶의 무게가 켠켠히 들어차서인지, 이상적 공간이기보다는 지치고 퇴색된 노곤함이 물씬 풍겨온다. 마침내 피터가 도달한 금서, '<<영원히 사는 법>>-초보자를 위한 영생'은 중국의 네 선인이 지키고 있는데, 과연 피터가 영생을 얻을 런지는 이대로라면 너무 수월하지 않을까 의심이 들던 차에-

피터가 대면한 '영원한 아이'는 그 책을 독파하고도 유일하게 제 정신을 잃지 않은 자로서 앞 서 경험한 자의 위엄으로 영생의 덧없음을 설파한다. 그의 절대적 피로와 노쇠한 불멸보다 더욱 설득력 있는 것은 없다. 

"그 책을 발견했을 때 나는 너보다 어렸고,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 그러고 나서 내 친구들이 자라날 때 나는 이대로 머물렀어. 친구들은 장남감에 싫증을 내고, 사람에 빠졌지. 친구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가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앉아서 바라보는 게 전부였지. 지금의 나는 시간 속에 얼어붙어 있어. 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스스로에게 일렀지만, 사실 내가 가진 것은 끝없는 내일들뿐이지. 영원히 산다는 것은 절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야. 그것이 바로 내가 책을 숨긴 이유다." 
 

콜린 톰슨이 내세운 '피터'는 네버랜드의 그 피터의 오마주일지도 모른다. 웬디와 그 딸들이 네버랜드를 왕래하는 동안 '영원한 아이'로 박제되어 있는 그 아이는 영원한 유년 속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철 네버랜드에 머무는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마는 덧없음을 현신일 수도 있으니. 선대의 '영원한 아이'의 절규에 찬 충고를 수용할 수 있는 이는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곧 영생에 대한 끝없는 집착이 인류의 역사의 현주소와 다를 것이 없다. 콜린 톰슨의 그림책답게 그로테스크한 화면구성 안에 우문현답을 펼쳐내고 있음을 또 다시 확인한다. 영생보다 더 탐나는 것이 영생을 찾아 헤매는 꿈의 도서관 기행임을 슬며시 고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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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향한 탑 그림책은 내 친구 23
콜린 톰슨 지음, 이유림 옮김 / 논장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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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나 아동보다 성인층에게 보다 더 어필하는 그림책 작가 콜린 톰슨의 『태양을 향한 탑』에는 세상의 모든 랜드 마크가 빼곡히 들어차있다. 오만해진 나머지 신과 대등해지고자 했던 인간들이 쌓았던 바벨탑은 이제 극심한 오염으로 짙은 구름층을 뚫고 도달하지 못하는 태양을 갈구하는 인류의 열망으로 변해, 태양을 볼 수 있는 탑을 쌓기에 이르는데, 그 재료가 바로 인류문화유산들인 거대 건축물들이다. 브뢰겔의 명화 속의 바벨탑은 태양도시를 구축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이 되고, 태양에의 갈망은 탑 위에 마구잡이로 쌓이는 랜드 마크들의 서글픈 잔재들이다.
 

근 미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오염된 지구의 초상은 SF영화에서나 봄직한 설정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당연한 수순으로 파국으로 치닫는 우리의 현주소이기에 감탄만 하며 책장을 넘길 수 없는 불편함을 야기한다. 세계의 부호조차 구름층을 뚫을 수 있을만한 에너지를 구할 길이 없으며, 야경을 자랑하던 고층빌딩의 조명들은 한밤에도 불을 밝힐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빈곤들에 마음을 쓰다가도 콜린 톰슨 특유의 블랙유머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어 그림책 자체를 여러모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돋보인다.
 

태양을 향하던 부호의 기구는 오염의 집합체인 구름층을 뚫지 못하고 좌초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바위 울루루에 건축하기 시작한 태양도시에 거대 인파가 동참하는 모습은 늘 그렇듯 잃고 나서야 가졌던 것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 인간의 늦된 본성이다. 가진 재산과 남은 생을 쏟아 부어도, 손자가 증손자를 낳은 시절이 와도 까마득하기만 한 이 마천루를 위한 극약처방은 세계 각지의 유명 건축물들을 통째로 옮겨야 쌓아올리는 것이다. 타지마할, 빅 밴, 오페라하우스, 만리장성,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금문교, 콜로세움, 판테온 등이 탑의 재료로 포개지고, 또 포개지다가 드디어 태양과의 조우가 가능해 지던 순간!
 

같은 시기에 소개된 『영원히 사는 법』이 영생의 덧없음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조명이었다면, 『태양을 향한 탑』은 파멸에 다다른 인류가 각고의 노력 끝에 다시 찾은 희망을 말하고 있어, 절망 속의 한 줄기 빛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만든다. 태양과 유리된 채, 파란 하늘이란 사진 속에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지구에 대한 부채를 떠넘기고 있는 작금의 실태를 모든 세대가 되돌아보게 만드는 메시지가 웅변적이다. 지구의 역사와 인류 문명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회복 불가능한 암울한 미래에 한 발짝씩 다가서는 기분으로, 시한에 다다른 모래시계를 뒤집어 파괴를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면 적어도 그것을 가속화시키는 몸부림에 제동을 걸어야하지 않겠는가.
 

모든 에너지가 바닥나고, 레일 위의 전차는 돛을 달고 달려야하는 시대, 우주로 나가도 푸른 별 지구의 자태는 더는 볼 수 없는 우중충한 풍광의 인간성마저 어두컴컴해지는 시절의 태양빛을 되찾으려는 염원은 혹독한 대가를 요구한다. 지상의 유일한 랜드 마크가 되어 마천루의 꼭대기에 앉아 바라보는 푸른 하늘과 태양에 감격하기 무섭게, 지상에는 탑에 오르고자 하는 인간들의 무리가 흡사 만리장성의 꾸불꾸불한 자취를 연상시키며 끝도 없이 늘어져있다. 너무도 당연히 누리던 것을 빼앗기고, 아니 스스로 더럽힌 것의 지당한 결과를 맞닥뜨려야하는 지상의 무리들이 천상을 탐하는 태고의 신화의 재연은 이다지도 가련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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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미자 씨 낮은산 작은숲 12
유은실 지음, 장경혜 그림 / 낮은산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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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존재는 사랑받지 않는 것이 의아스럽다, 보통은. 그것은 외모일 수도 있고, 지위일 수도 있고, 그의 경력일 수도 있으며, 그 모든 것과 아무 상관없는 무조건적이 애정에 기반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콩깍지라는 것이 조건을 수반하지 않는 돌발적인 예외에 속하지 않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찮게 보는데, 사랑스러워야 사랑하기 수월한 애정의 연상 작용이 이해 불가한 것은 아니다. 여기, '미자'라고 불리는 지질함의 결정체 같은 여인네를 보면 애정보다 실소가 터져 나오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던 첫 인상은 과연-


유은실의 신작 『우리 동네 미자 씨』의 타이틀 롤은 날품팔이 동네식객 노처녀 미자 씨인데, 마을 어른들에게는 "미자야!"라고 불리고, 아이들에게는 "아줌마"로 불리며, 사실 "미자 씨"라고 격식 있게 불러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가씨였을 때 '어쩌다' 빚을 잔뜩 지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졌다는 과거지사가 얼핏 소개되지만, 워낙 낮은 곳의 생활을 꾸려나가는 하루하루라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커다란 모험처럼 느껴진다.


동네 슈퍼에는 외상이 잔뜩 있고, 잔치마다 빼놓지 않고 찾아들어 잔뜩 얻어먹지만 선물은 챙긴 적 없으며, 아이들 주전부리를 뺏어먹으며 끼니를 해결하곤 해서 원성을 사고, 유일한 말동무는 주인집 더부살이 조카딸 성지인데 늘 일방적으로 타박을 듣기만 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일용직에 적합한 튼튼한 몸 밖에 없는, 세상의 트렌드와 역행하는 아이콘인 미자 씨이다. 강박적이고 연출된 세련미를 과시하는 1%보다 우리에게 훨씬 가까운 존재일수도 있는데 유은실의 극작법은 언제나 그렇듯, 사소한 존재에 대한 천연덕스러운 재조명이라 하겠다.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 라면을 먹을 때조차 스프를 아끼고, '도둑이 들까봐' 쌀을 옷장 깊숙이 넣어두고, '추리닝'이 아닌 옷가지라고는 올이 다 풀린 코트나 주인집 아저씨가 물려준 남자 점퍼뿐인데도 미자 씨는 주눅 들지 않는다. "아줌마는 왜 그렇게 없는 게 많아?"라는 성지의 구박에 없는 것을 자꾸 생각하면 불행해진다는 미자 씨의 대답은 그녀의 존중받아 마땅할 고난 속에서 체득한 귀한 생존법이다. 물론 어린이책의 주인공으로서, 아이들의 대리만족을 충족시킬만한 히로인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겠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유은실의 히로인들은 '보통'이 아닌 '보통'. 조금은 색다른 '보통'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켜야 한다.


남몰래 짝사랑하던 부식 차 아저씨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펑펑 우는 미자 씨와 부모님의 이혼으로 큰댁에 맡겨진 채 미자 씨의 불행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위안삼곤 했던 성지의 마지막 포옹은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들이야말로 더욱 사랑받아 마땅하다는 간과되기 십상은 자명한 이치를 넌지시 묻고 있는 듯하다. 너무나 가진 것이 없어 내일을 꿈꾸는 것이 사치스러운 이들에게 싸늘한 냉대 대신, 그네들의 외로움의 그림자를 옅게 만들어주는 '남다른 보통'에 대한 인정을 되새겨보게 한다. All You Needs is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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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중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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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뉴욕의 어느 빌딩의 7과 1/2층은 존 말코비치의 뇌로 가는 통로가 된다. 유명배우의 정신을 15분 동안 조정할 수 있는 허무맹랑하고 획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압도적 상상력 앞에서 일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감탄, 그리고 커져 가는 웃음뿐이다. 7층과 8층 사이의 모호하게 걸쳐진 의심쩍은 비밀통로는 자꾸만 찾고 싶어지는 마력을 내뿜게 되는데, 일상과 비 일상이 전복되어버리고 마는 부작용이 예고되어 있다고 해도 한 번쯤 주저 없이 모험하고 싶은 기분이다. 막연히 어느 유명인의 뇌 속에 자리 잡고 싶었던 일탈욕은 우리네 젊은 작가들의 7편의 단편을 선정해 『2010 제 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라고 수렴된 한 권의 책에서 소소히, 그리고 넘치게 보장받게 된 것은 아닌지 살포시 고백하면서, 젊은 작가들의 뇌관 속으로 유영해간다.  

 데뷔한 지 10여년 안팎의 신진과 중견 작가 사이의 경계에 7과 1/2층처럼 놓여있는 일곱 작가는 존 말코비치만큼의 거대한 명성의 대변자들은 아니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문단의 주축들이다. 유수의 문학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전례와 재기 넘치는 소설집이 근례에도 주목받고 있는 경우가 상당해, 새로운 작가의 발굴이라고 오해하기 십상인 인상이 아니라 현장의 젊은 작가들과 함께 호흡해나가겠다는 취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만든다. 한 마디로 일곱의 작가, 일곱의 작품은 다소 어정쩡한 경계선에 존재하는 존 말코비치의 뇌로 통하는 은밀한 모처처럼 닮은 구석도 없이 개성의 영역을 확장시켜 갈 뿐이다. 냉큼 올라타는 자에게 신세계의 통로가 열리리라는 계시와 함께.
 

대상 수상작 김중혁의 「1F/B1」이 가장 눈에 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루키의 단편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능청스러운 유머와 사소한 것들의 재조명이 거기 있었다. 고층건물의 증식과 더불어 건물의 부속품격으로 인식되는 건물관리자들의 비애와 사명감이 '건물관리자연합'으로 대변되면서 펼쳐지는 도심 속의 그들만의 음모론에 포복절도하다가도 멈칫한다. 김중혁이야말로 존 말코비치 뿐만 아니라 다수의 7과 1/2층의 비밀을 진즉 발견해낸 작가가 아닐까싶어서. 1층과 지하 사이의 표식인 '1F/B1'을 'FBI'로 읽는 건물관리인의 한정 없는 자부심과 "그거는요, 그냥 1층 위에 2층 있고, 2층 위에 3층 있다는 표시거든요.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슬래시 아무 데나 쭉쭉 그어놓으면 큰일나거든요."라는 현실감각 이상무인 또 다른 건물관리인의 선언 사이에서 결코 좌초하지 않는 비밀통로의 설계자로서의 작가의 절묘한 균형감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대상작이 타인의 뇌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같은 면모를 충족시켰다면 여타의 단편들은 씁쓸한 삶의 이면들로 통하는 갓길 같은 구석이 있다. 일상은 더욱 건조해지고, 비 일상은 일상의 냉혹과 몰이해의 또 다른 이름인 것처럼 냉소적인 면모가 짙어지는, 한 번도 탈선한 적이 없어 사소한 사고가 거대한 변주로 이어지고 마는 진리의 확인처럼. 굳이 비슷한 구석이 없는 몇몇 단편들을 조금은 억지스럽게 취합해본다면 타인의 죽음으로 일상을 모험하고 비 일상과 화해에 이르는 순환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타인의 부고를 기다리면서 권태에 절어있는 사이, 스스로도 의심쩍어지는 이별과 구애를 동시에 해버리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는 죽음과 삶의 영역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순간을 극적으로 포착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내보다 가까웠던 첫사랑의 부고와 그가 남긴 불가해한 존재에 대한 발명품을 둘러싼 소동인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는 '존재'를 둘러싼 거대한 철학적 사유와 농담의 간극을 밀도 있게 추구한다. 웃을 수 없어서 개그맨이 되었다던 첫사랑의 남자를 유골의 모습으로 마주하면서 비로소 눈물을 흘리고 헤어짐을 완성하는 여자의 이야기, 김성중의 「개그맨」은 묵힌 감정을 토해내는 별리의 순간을 폭발적으로 그려낸다. 삶과 죽음이 한 몸처럼 얽혀들어 의도치 않은 혼선을 부르고, 대다수는 그 혼선 속에서 다시 삶으로 전환되는 순환의 교차점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초신성의 폭발과 다름 아니다.
 

물론 일곱 작가의 일곱 단편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우겨 넣어보자면 소통의 부재라는 간명한 분류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장욱의 「변희봉」에서 명배우에 대한 타인들과의 엇갈린 기억을 가진 남자 만기는 인생의 대소사에서 엇박자를 연출할 뿐이다. 김미월의 「중국어수업」에서 절대 다수가 위장체류 중인 중국인 수강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수는 인천행 지하철 안에서 여러 겹의 신파로 엮인 아날로그적 사연들과 마주한다. 정소현의 「돌아오다」는 자수성가한 할머니가 실패한 자식들과의 관계를 보상받기 위해 붙잡아둔 손녀가 낡은 집에서 젊은 시절의 엄마와 재회했다 서글프게 헤어지고 마는 판타지를 구현한다. 명배우에 대한 이해받지 못하는 동경, 불법체류자들을 가리는 수단이 되어 버리는 언어, 버리고 버림받는 고립된 가족이라는 불통의 이야기들은 이 작품집을 우울한 희망으로 물들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단의 현장성을 존중하고 함께 호흡하려는 당찬 포부가 1회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기우가 밀려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올해의 일곱 작가, 그리고 그 다음 일곱 작가군의 활발한 활동에 의미 있는 교두보가 되어준다면 제 역할을 이행하고도 남음이며, 장수의 당위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신진과 중견의 사이, 작품성과 화제성의 사이, 평단과 독자의 사이사이에 자리한 믿을만한 슬래쉬, 경계의 유쾌한 비밀통로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2회의 선전을 고대하는 마지막 노파심을 남겨놓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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