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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중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뉴욕의 어느 빌딩의 7과 1/2층은 존 말코비치의 뇌로 가는 통로가 된다. 유명배우의 정신을 15분 동안 조정할 수 있는 허무맹랑하고 획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압도적 상상력 앞에서 일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감탄, 그리고 커져 가는 웃음뿐이다. 7층과 8층 사이의 모호하게 걸쳐진 의심쩍은 비밀통로는 자꾸만 찾고 싶어지는 마력을 내뿜게 되는데, 일상과 비 일상이 전복되어버리고 마는 부작용이 예고되어 있다고 해도 한 번쯤 주저 없이 모험하고 싶은 기분이다. 막연히 어느 유명인의 뇌 속에 자리 잡고 싶었던 일탈욕은 우리네 젊은 작가들의 7편의 단편을 선정해 『2010 제 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라고 수렴된 한 권의 책에서 소소히, 그리고 넘치게 보장받게 된 것은 아닌지 살포시 고백하면서, 젊은 작가들의 뇌관 속으로 유영해간다.
데뷔한 지 10여년 안팎의 신진과 중견 작가 사이의 경계에 7과 1/2층처럼 놓여있는 일곱 작가는 존 말코비치만큼의 거대한 명성의 대변자들은 아니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문단의 주축들이다. 유수의 문학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전례와 재기 넘치는 소설집이 근례에도 주목받고 있는 경우가 상당해, 새로운 작가의 발굴이라고 오해하기 십상인 인상이 아니라 현장의 젊은 작가들과 함께 호흡해나가겠다는 취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만든다. 한 마디로 일곱의 작가, 일곱의 작품은 다소 어정쩡한 경계선에 존재하는 존 말코비치의 뇌로 통하는 은밀한 모처처럼 닮은 구석도 없이 개성의 영역을 확장시켜 갈 뿐이다. 냉큼 올라타는 자에게 신세계의 통로가 열리리라는 계시와 함께.
대상 수상작 김중혁의 「1F/B1」이 가장 눈에 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루키의 단편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능청스러운 유머와 사소한 것들의 재조명이 거기 있었다. 고층건물의 증식과 더불어 건물의 부속품격으로 인식되는 건물관리자들의 비애와 사명감이 '건물관리자연합'으로 대변되면서 펼쳐지는 도심 속의 그들만의 음모론에 포복절도하다가도 멈칫한다. 김중혁이야말로 존 말코비치 뿐만 아니라 다수의 7과 1/2층의 비밀을 진즉 발견해낸 작가가 아닐까싶어서. 1층과 지하 사이의 표식인 '1F/B1'을 'FBI'로 읽는 건물관리인의 한정 없는 자부심과 "그거는요, 그냥 1층 위에 2층 있고, 2층 위에 3층 있다는 표시거든요.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슬래시 아무 데나 쭉쭉 그어놓으면 큰일나거든요."라는 현실감각 이상무인 또 다른 건물관리인의 선언 사이에서 결코 좌초하지 않는 비밀통로의 설계자로서의 작가의 절묘한 균형감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대상작이 타인의 뇌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같은 면모를 충족시켰다면 여타의 단편들은 씁쓸한 삶의 이면들로 통하는 갓길 같은 구석이 있다. 일상은 더욱 건조해지고, 비 일상은 일상의 냉혹과 몰이해의 또 다른 이름인 것처럼 냉소적인 면모가 짙어지는, 한 번도 탈선한 적이 없어 사소한 사고가 거대한 변주로 이어지고 마는 진리의 확인처럼. 굳이 비슷한 구석이 없는 몇몇 단편들을 조금은 억지스럽게 취합해본다면 타인의 죽음으로 일상을 모험하고 비 일상과 화해에 이르는 순환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타인의 부고를 기다리면서 권태에 절어있는 사이, 스스로도 의심쩍어지는 이별과 구애를 동시에 해버리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는 죽음과 삶의 영역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순간을 극적으로 포착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내보다 가까웠던 첫사랑의 부고와 그가 남긴 불가해한 존재에 대한 발명품을 둘러싼 소동인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는 '존재'를 둘러싼 거대한 철학적 사유와 농담의 간극을 밀도 있게 추구한다. 웃을 수 없어서 개그맨이 되었다던 첫사랑의 남자를 유골의 모습으로 마주하면서 비로소 눈물을 흘리고 헤어짐을 완성하는 여자의 이야기, 김성중의 「개그맨」은 묵힌 감정을 토해내는 별리의 순간을 폭발적으로 그려낸다. 삶과 죽음이 한 몸처럼 얽혀들어 의도치 않은 혼선을 부르고, 대다수는 그 혼선 속에서 다시 삶으로 전환되는 순환의 교차점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초신성의 폭발과 다름 아니다.
물론 일곱 작가의 일곱 단편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우겨 넣어보자면 소통의 부재라는 간명한 분류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장욱의 「변희봉」에서 명배우에 대한 타인들과의 엇갈린 기억을 가진 남자 만기는 인생의 대소사에서 엇박자를 연출할 뿐이다. 김미월의 「중국어수업」에서 절대 다수가 위장체류 중인 중국인 수강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수는 인천행 지하철 안에서 여러 겹의 신파로 엮인 아날로그적 사연들과 마주한다. 정소현의 「돌아오다」는 자수성가한 할머니가 실패한 자식들과의 관계를 보상받기 위해 붙잡아둔 손녀가 낡은 집에서 젊은 시절의 엄마와 재회했다 서글프게 헤어지고 마는 판타지를 구현한다. 명배우에 대한 이해받지 못하는 동경, 불법체류자들을 가리는 수단이 되어 버리는 언어, 버리고 버림받는 고립된 가족이라는 불통의 이야기들은 이 작품집을 우울한 희망으로 물들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단의 현장성을 존중하고 함께 호흡하려는 당찬 포부가 1회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기우가 밀려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올해의 일곱 작가, 그리고 그 다음 일곱 작가군의 활발한 활동에 의미 있는 교두보가 되어준다면 제 역할을 이행하고도 남음이며, 장수의 당위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신진과 중견의 사이, 작품성과 화제성의 사이, 평단과 독자의 사이사이에 자리한 믿을만한 슬래쉬, 경계의 유쾌한 비밀통로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2회의 선전을 고대하는 마지막 노파심을 남겨놓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