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하는가 - 이나모리 가즈오가 성공을 꿈꾸는 당신에게 묻는다 서돌 CEO 인사이트 시리즈
이나모리 가즈오 지음, 신정길 옮김 / 서돌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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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사람들의 인생 비법, 경영법을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늘 상 세상을 보던 삐딱한 시선이 아니라, 자기혁신의 준비 정도는 갖추도록 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차피 성공한 이들의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정상에서나 할 수 있는 빤한 소리로 치부해버리곤 했던 지난 독서이력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러면서도 다시 자기계발서, 경영서를 찾게 되는 악순환은 타인의 성공과 조언을 곡해해버리는 본인의 심중을 염두 해두지 않고, 성공의 비결만 탐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젊은 세대라고 써야할지, 우리 세대라고 써야할지 잠깐 망설였지만, '우리 젊은 세대'는 이나모리 가즈오의 지적만큼 풍요로운 시대를 살면서 일하기를 싫어한다. 놀기 위해 일하고, 더 많은 여가 시간을 가지기 위해 일하고, 일이 여가에 방해가 되면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서도 일을 박차고 나오는 것이 무모하긴 해도 용기 있는 행동처럼 비추기도 한다. 일을 위해 일을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는 것은 평생직장이 보장되는 시절도 아니거니와, 고급 인력이 그대로 사장되는 청년 실업의 시대를 살기 때문이라고 세간의 이야기를 늘어놓아봤자 변명일 뿐임을 모르진 않는다.


파인세라믹 분야의 전설인 쿄세라의 창업주 이나모리 가즈오는 성공의 비결을 설파하기 앞서 묻는다. "왜 일하는가?" 순간, 왜 일하느냐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과연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본다. '할 수 없어 일 하다'라는 분위기를 온 몸으로 풍기며 하루하루를 견디어내는 나를 포함한 젊은 세대들에게 일에 대한 철학이 존재하느냐를 재구성하는 일은 질문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인생을 즐기기 위해 일은 견디어내는 것이 동시대 젊은이들의 광범위한 공감대라고 해도 그리 빗나가는 예측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왜 일하는지 자신에게조차 설명할 말이 궁색한 이들인 것이다.


이나모리 가즈오의 일에 대한 철학은 단순 명확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실천하기 어렵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빠른 성공과 일하지 않기 위한 성공만을 탐하려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인생철학 교과서로 삼을만하다고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라, 작은 일에서도 큰 만족을 얻어라, 뜻을 세우고 그 길을 가라, 베스트보다는 퍼펙트를 꿈꿔라, 창조적이고 주도적인 사람이 되라는 조언들은 이 책이 아니어도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경구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일터에서의 경험과 경영에서 얻은 사심 없는 조언임을 읽어본 이들은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일하지 않기 위한 빠른 성공과 요행을 꿈꾸는 세대에게 일에 대한 철학은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일에 대한 철학을 가진 바 없기 때문에 일터에서의 탈출만을 꿈꾸는 악순환은 결코 끊이지 않는다. 시련이란 좌절의 동의라고 여기는 젊은이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새로운 도약으로 치환되는지 성공한 이들의 사례를 받아들이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이나모리 가즈오처럼 뜻을 품었다면 뜻을 행하는 것에 게으르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손이 베일만큼’ 몰입하여 완성을 꿈꾸는 것을 실천하는 자세가 일, 타의가 아닌 자의로 인해 추진하는 일에 필요하다는 진리.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그 일을 사랑하라는 소소하지만 절대적인 명제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다. 궁극의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보이지 않는 손길을 기원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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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강력 아빠 팬티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아빠 이야기 꿈공작소 4
타이-마르크 르탄 글, 바루 그림, 이주희 옮김 / 아름다운사람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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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 똥, 코딱지. 더럽지만 아이들에게 실패하지 않는 아이템이다. 확실하다. 슈퍼 히어로, 거인, 악당. 역시 아이들은 열광한다, 물론 남자아이들이 더더욱. 팬티가 나오는 이야기도 인기폭발이다. '빤스'가 들어가는 어는 아동 히어로물이 인기가 많았던 것도 같다. 꼭 겉옷 위에 입는 원색의 팬티를 입은 슈퍼 히어로는 고전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세대를 불문하고 인기도가 높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안티 히어로에 끌리는 마이너한 성향을 가진 아이라면 엽기 과학 쪽으로 살펴보면 '프래니'라는 꽤 괜찮은 캐릭터를 추천할만 하겠다.


'세상에서 가장 힘센 우리 아빠'는 남자 아이들의 로망이다. 그 로망이 깨져가는 순간을 무사히 극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통과의례임은 물론이고. 『초강력 아빠 팬티』의 아빠는 무려 프로 레슬러이다. 챔피언 팬티는 아빠의 상징이며 유니폼이다. 아빠가 팬티를 입고 레슬링을 하러 출근하는 것에 태클을 걸 사람은 설마 없겠지? 아이들의 저 기대에 찬 눈을 보면서 그렇게 이야기할 용기가 있다니, 그런 잔인한 영혼은 책장을 조용히 덥고 침묵해주길 바란다.

아무튼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프로 레슬러이며, 엄마가 '슈퍼 챔피언'의 약자를 수 놓은 팬티를 입고 출근한다. '지옥의 팽이'와 '노르망디 장롱' 같은 레슬러들이 아빠의 직장 동료인데, 거하게 싸우고 돌아오면 엄마가 상냥한 위로를 해준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나고, 세상에서 가장 힘센 프로 레슬러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우리 아빠'가 된다. 아빠와 가장 친한 레슬러 아저씨는 거인 중의 거인인 '지부티 거인'인데 아빠에게 무릎을 꿇고 친구가 되었다. 아빠 만세다!


아무튼 슈퍼 챔피언 팬티를 입고, 레슬러 가면까지 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아빠는 아들을 위해 일상의 여러 가지 일들을 척척 수행하는데, 아들 기 살리기에는 최상이요, 주변의 민폐는 산더미 같다. '그럼 어때, 우리 아빠가 이기는데!'라는 아들의 큰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잊지 말자, 어디까지 이 책은 남자아이들의 로망을 충실히 재현해주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역시 세상에서 가장 힘센 아빠에 대적할만한 라이벌이 등장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구성은 없다. 그래서 등장한 역시 '세상에서 가장 힘센 또 다른 레슬러 아빠'인 '핵폭탄 따귀'마만큼 적역인 인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만능 우리 아빠'에 관한 따스하고 유머러스한 책들이 촤르륵 펼쳐진다. 당당히 한 자락을 차지하기에는 워낙 뉴페이스인 관계로 다소 시일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읽는 내내 아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만져지는 기분이었다. 무한도전도 레슬링 중, 그림책도 레슬링 중이다. 레슬링에 빠진 당신, 아이와 함께 이 책도 읽어보시라. 아빠는 자랑스러워하는 아이의 눈빛으로 세상에서 가장 힘 센 사람이 된다는 진리를 끄집어내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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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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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깔깔거리다가 표지를 확인한다. 먹먹한 여운에 명치를 강타당하고 또 다시 표지를 확인한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은 소설집인데, 유명 포털의 베스트 공감게시물을 보는 기분이어서.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공감과 추천을 클릭하고, 실시간 댓글을 쓰고 싶었는지. 가끔은 작가의 네임 밸류에 눌려 읽기도 전에 대략의 인상을 정해놓고 오차범위 내의 국지적 독서를 하는 경우가 생기곤 하는데, 언제나 왕성하고 다채롭게 시대와 호흡하는 작가일수록 그런 경향이 생겨버리는 것에 난감해할 때 쯤, 김영하가 돌아왔다. 불패의 작가라는 내 안의 이미지와 더불어. 

 

그의 소설은 시대적 기표들로, 핫 아이템으로, 트렌드로 가득하지만 결코 휘발적이지만은 않은 묘미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베스트 '톡'으로 공유하는 일상의 부유물들이, 그의 달변과 내공을 거치면 하루치의 웃음과 깊이에의 강요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갖추게 되는 것이 얄미울 정도다. 쿨하고 스마트하고 적당한 허세로 무장한 신변잡기의 시대를 살면서도 사실은 '쿨하지 못해 미안'한 뒤끝 넘치는 평범한 사람을 조명하고 중계하는 솜씨야말로 김영하의 장기가 아니겠는가?
 

소설집『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의 인물들은 자유자재로 스마트하게 소통할 수 있는 시절을 살면서도 불통의 인간관계를 개선해갈 수 없다. 통신기술의 진화는 오히려 주변인들의 일상을 간편하게 추적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하지만, 마음의 간극을 회복불가능하게 벌려놓는 반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을 능청맞게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일상을 생중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미니홈피, 페이스북, 트위터 중독자들은 자신들을 추적한 단초를 스스로 제공하고, 그에 화를 입으면서도 거기에 하소연할 수밖에 없는 굴레를 짊어지고 있진 않은지 새삼스러울 것 없어도, 언제나 소름끼치는 현실을 다시금 만난다.
 

이 불통의 인물군상들 중 하나쯤은 온, 오프라인 상에서 조우한 적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일촌이 끊겨버린 옛 연인일 수도 있고, 비밀번호를 해킹하면서까지 스토킹 하고 싶은 문제적으로 엮여있는 지인일수도 있고, 넘쳐나는 부도덕과 타락의 시대에 슬며시 끼어드는 것이 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오히려 항변을 늘어놓는 그런 주변인일 수도 있다. 중차대한 인생의 터닝 포인트들이 마구잡이로 중계되고, 소모되고, 추적되고, 그러다 한순간에 잊혀져버리곤 하는 스마트한 시대의 스마트하지 못한 이력들을 민낯으로 목도하는 기분의 생경함이 날이 선채로 전달되지 않도록 불편함을 중재하는 이 능수능란함이라니! 


각기 다른 커뮤니티에 속해있어도 일상적으로 공유하는 이슈의 총체는 별다를 것이 없다. 미담보다는 파경, 결별, 폭로성 이슈들로 점철되곤 하지만, 한 곳에 가만히 머물러도 지속적인 펌으로 타인의 일상을 필요이상으로 엿보면서도 정작 자신도 그 도마 위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버리기 십상인 우리네라, 무겁고 긴 글이면 '패스'해 버리는 세태에까지 호소할 수 있는 소설집과 만날 수 있어 반갑기 그지없었다. 질척이는 일 없고, 맺고 끊음에 망설임이 없는 그런 사이버상의 바람직한 인생그래프처럼 살풍경한 것이 또 있을까? 

 

그때는 그 죽일 놈의 쿨인가 뭔가 때문에 헤어진 남자하고도 웃으며 만나야한다는 게 이십대 사이에 팽패해 있었다.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느냐에 매달리자 그 오빠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지영아, 너 왜 이래, 너 쿨한 애잖아."
쿨한 거 좋아하시네! 권총이 있으면 그 오빠 머리통에 대고 "어서 살려달라고 말해. 안 그러면 쏴버릴 거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쿨이니 뭐니 종알대는지 보게. (110p)

  

쿨함을 강요받고, 스마트함을 증명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소비하는 시류 속에서 정작 쿨하지 못하고, 스마트하지 않게 표류하는 인물들이 나만이 아니었다는 기묘한 안도감에 빠져든다. 일견 추레해 보일 수 있는 현대인의 초상이 추레하지만은 않게 그려질 수 있는 것은 동시대인에 대한 작가의 이해와 연민에서 기인한다고 믿고 싶다. 일상과 비 일상의 불분명한 경계를 그토록 밀도 있게 추적해서 재구성할 수 있는 불패의 작가, 김영하에 대한 인상은 지극히 광범위한 오차범위 탓에 더욱 공고해져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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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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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를 읽고 있다고 하면 지인이 말하고 했다. "너무 가볍지 않아?". 신경숙을 읽고 있을 땐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라고 했던가? 하루키와 신경숙을 읽고 있을 때마다 나는 그에게 변명을 해왔던 것 같다. 누구를 위해서인지도 모르면서 최선을 다해. 그가 가진 가벼움에 대한 너무나 가벼운 오해와 감상적이라는 어휘에만 가둬둘 수 없는 절대 고독 같은 것을 최선을 다해 전하고자하다가 결국은 점점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의 하루키와 신경숙이 그렇게 박제되어있는 것을 구제하기는 것은 내 몫이 아니며, 그를 설득하는 번거로움에 열을 내기보다는 나 홀로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을 더는 방해받고 싶지 않았을 테다. 
 

신경숙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 안에서는 최적의 공간을 시뮬레이션 하곤 한다. 너른 평상이 있는 시골집 마당, 자식들 주전부리를 위해 쉴 새 없이 한 솥 가득 무언가 쪄내고 있는 부엌께, 시골집에 다다르는 깊은 밤의 산책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마냥 근원적 공간으로 나를 초대하고 나면 그때서야 활자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된다. 냉소와 불신의 시대, 신경숙의 소설은 여전히 '감상적'이며 절대 고독으로 점철된 시린 젊음을 토로한다. 홀로 고독하고 함께 있어도 구원받지 못하는 그 청춘들은 또 어느 시골집에서 위안을 찾고, 상실된 엄마를 그리워할 테지.
 

윤, 단, 명서, 미르. 주인공의 이름에서 벌써부터 나는 죽음을 예견하고, 극복할 수 없는 상실과 좌절을 맛본다. 외자인 이름을 가진 신경숙의 캐릭터들의 비애를 지금도 상처로 기억하는 내게, 이들의 젊음은 비극의 굴레를 짊어진 선고처럼 비춘다. 윤과 단, 미르와 명서는 각각 유년을 함께하고 영혼의 일부를 나눠가진 존재들이다. 윤과 단이 그들만의 시공에 놓여있다면, 미르와 명서 또한 분리 불가능한 소울 메이트라 할 수 있는데, 답해 줄 수 없는 사랑과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황들이 뒤섞여드는 것을 목도하는 것은, 예측의 문제가 아닌 극한의 감정선을 요하는 문제라 종종 숨이 멎곤 한다.
 

하루키의 전공투와 마찬가지로 우리 세대는 그 시절의 시위를 문학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대학이 폐쇄되고 강의실을 지키는 일이 점차 무력해지는 시절의 최루가스 자욱한 시절의 이야기를 조곤이 들려주는 이들을 대학에서 만난 적이 과연 있었던가? 윤, 명서, 미르가 가졌던 상아탑의 시인, 윤교수의 '크리스토프 론'을 들어본 일이 있기는 했던가? 시위가 필요치 않은 시절을 물려주기 위해 시위했던 이들의 바람처럼 소요가 필요치 않은 시절을 누렸던 적은 있는가? 크리스토프는 어린 예수를 강 저편으로 건너게 하다가 자신이 짊어진 것의 정체를 알게 된다. 세상을 너무 떠안고 있는 존재를 짊어진 자의 어깨를 떠올려본다. 우리는 누구나 크리스트프라고 윤교수가, 신경숙이 말한다. 세상을 짐 지고, 그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다름 아닌 자신이라고, 청춘의 무게에 질식해버릴 것 같은 시간을 가져보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다고.
 

군에서 의문사로 죽은 단을 짊어진 윤, 분신해버린 언니의 실종된 연인을 찾아 헤매다 목숨을 놓아버린 미르를 둘러 안고 살아가야하는 명서는 함께 있어 파멸해버릴 불확실한 미래를 피해 닿지 않는 곳에서 머물게 된다. 새벽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어떤 상황이든 간에 그.쪽.에,서 이.쪽.으.로 오갈 수 있었던 그 시절을 가진 이들의 재회가 윤교수의 부음 즈음이라니, 우리는 소중한 누군가를 상실해가는 그 순간에서야 뒤늦은 조우를 하게 되는 모양이다. 나를 짓누르는, 내가 짐 진 것에만 허덕이다가 모든 이들이 세상에 짓 눌린 채였다는 것을 이제야 인정하게 된다.
 

락가수는 스물여덟에 죽고, 구원자는 서른셋에 죽는다. 불멸과 전설이 되기 위해선 요절이라는 과정이 그 끝에 자리잡아야한다. 영원한 젊음, 불멸의 명성을 얻기 위해 젊음의 정점에서 생의 저편으로 건너가 버린 이들의 전설의 완성을 위해서 살아남은 자들은 오명을 감수한다. 실상 의미 있는 죽음이란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위로로 존재하기도 한다는 것을 모르는 척 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끝나버려서 안 되는 젊음을, 아직 이편에 서 있는 우리는 너무도 많이 껴안고 산다. 고통으로 점철된 젊음의 시간이 뒤돌아보면 가장 찬란했다는 진실을 인정하는 것과 사투를 벌이면서. 지지 않는 청춘은 없다, 그리고 완벽한 절망 또한 없다. 
 

신경숙의 소설은 여전히 감상적이다. 이 소설은 감성적인 청춘소설이다. 네 남녀의 엇갈린 행보를 그린 순애보가 아니라, 소소한 이름을 명명하고 습작이며, 명문들을 적곤 했던 비밀의 노트를 가져본 적이 있는 이들을 위한 그런 청춘소설. 나를 위로해주었던 것이 지금은 바스러져버린 낡은 시집의 한 구절일 수도 있고, 어느 새 절판되어버린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진 추억의 책일 수도 있었던 이들을 위한 그런, 옛 청춘을 위한 초혼가이자 지금에서야 치르게 된 안녕의식을 위한 청춘소설. 안녕이다, 그리고 다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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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주사위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4
마크 앨퍼트 지음, 이원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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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대단치 않은 인물이라는 본인의 생각과는 다르게 우리는 온통 감시와 통제 하의 상황 속에서 일상을 보낸다. 개인정보유출과 불법감찰의 여파는 경각심을 일깨우기는 하지만, 지속적인 대처와 재발방지보다는 여름날의 태풍처럼 자연소멸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음모론이 더 이상 공상이 아닐 경우, 오히려 불합리한 현실을 재구성하는 그럴 듯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점차 진화하는 스릴러를 통해 해본다. 그리고 곧 미드를 끊어야겠다는 부질없는 결심도 함께.

『다빈치 코드』에서 그네들의 추적이 성배, 예수의 후손을 찾는 음모론의 향연이었다면, 『신의 주사위』는 물리학의 궁극적인 이상을 담은 또 다른 성배, 아인슈타인의 말년의 대 연구였던 통일장 이론을 둘러싼 피의 암투를 그리고 있다. 마치 종교든 과학이든, 맹신에 이르면 야기되곤 하는 파멸을 충실히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을 보는 기분이다. 성배가 어느 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가는지에 따라 결정지어 지는 인류의 미래라니, 사실 '신상' 스릴러에 기대하게 되는 참신한 스토리텔링은 아니다.

클래식의 영역에서는 모차르트, 과학 분야에는 아인슈타인만큼 압도적인 아이콘이 있을 수 없다. 이보다 더 친근할 수 없는 대중성과 전문가들에게도 언제나 영감을 제시하는 존재로 더 이상 조명할 것이 없는 헌신적인 연구 속에서도, 결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지 않은가. 또 하나의 아이슈타인 음모론을 대하는 다소 삐딱한 태도로, 얼마나 더 자극적인 핏빛 잔혹극이 스펙타클하게 펼쳐질런지, 그것을 상쇄하려면 전문적인 이론과 최신수사기법을 밀도 있게 그려내는지가 관건이겠지 하면서.

중력과 전기력, 핵력을 아우르는 통일장 이론은 끝내 정립되지 못하고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아인슈타인은 의도적으로 정립된 이론을 발표하지 않고 몇몇의 수제자들에게 암호화한 단서만을 남겼다는 토대로 시작하는 과학스릴러. 상대성이론이 맨하탄 프로젝트의 단초가 되었던 것처럼 물리학의 성배가 또 하나의 돌이킬 수 없는 참사를 불러일으킬 것을 거인의 예견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진행되어버린다. 대테러 작전에 이론을 접합하려는 미 국방부, 무차별적인 미군의 테러진압에 가족을 잃고 복수를 꿈꾸는 러시아용병,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온전히 지키고자 사투를 벌이는 실패한 물리학자였던 과학사 교수. 이 와중에 무자비한 청부업자와 미국 정부의 대처방식은 한 몸통에 머리가 둘 달린 괴물마냥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성배란 봉인되어 있을 때, 그것을 좇는 필사의 업을 수행할 때만이 무지갯빛일 수도 있다. 인간의 본성이란 인류의 향방을 결정짓는 희대의 보화를 이상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걸림돌이며, 평화 그 자체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라는, 이내 수긍할 수밖에 없는 씁쓸한 결론을 목도하는 일은 그리 유쾌할 리 없다. 미치광이 과학자와 테러리스트, 국가기관의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 암투 앞에서 지켜낼 수 없는 성배에 다다르려고 하는 몸부림은 타버릴 줄 알면서도 불가로 달려들 수밖에 없는 부나방의 몸짓과 닮았다.

얼마나 널고 깊게 통상적인 감시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극명하게 그리고 있어, 물리학의 성배를 둘러싼 핏빛 암투 이상으로 소름이 끼쳤다. 전화를 엿듣고, 접속 현황을 추적하고, 머리 위에 떠 있는 감시위성 아래에서, 구글링 하나로 자신도 잊고 있었던 흔적들을 대번에 노출하게 되는 첨단의 시대에서, 제이슨 본도 아닌 우리네는 살아남기 너무 강판하다는 불콰한 깨달음이 덜렁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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